기타 2018. 8. 11. 17:42

Le serviteur du mal (악의 하인悪の召使 프랑스어 번안곡)



Tu es ma princesse et je ne suis que ton serviteur

Ces deux jumeaux pitoyables, le destin les divisa

Juste afin de te protéger ma très chère soeur

Je deviendrai moi même un démon pour toi


당신은 나의 공주님 그리고 나는 당신만의 하인

운명이 갈라놓은 가엾은 두 쌍둥이

소중한 나의 누이여, 단지 당신을 지키기 위해

난 악마가 되어 보이겠어요


De grandes attentes reposaient sur nous depuis la naissance

Et même le son des cloches de l’Eglise nous bénissait

D’égoistes adultes nous ont supprimé toutes nos chances

Tandis qu’ensemble ils complotaient, notre futur se déchirait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큰 기대를 받았죠

교회의 종소리도 우리를 축복했고요

이기적인 어른들은 우리의 모든 선택을 빼앗아갔어요

그들이 꾸민 음모에 우리의 미래는 조각나버렸고요


Meme si tu t’attirais les foudres des gens,

Que le monde entier devenait ton ennemi,

Sache que je te protègerai éternellement

Reste là, ne pense pas à ça et souris


당신이 사람들의 분노를 산다 해도

온 세상이 당신의 적이 된다 해도

내가 영원히 지켜준다는 걸 기억해요

거기 있어요, 신경쓰지 말고 웃어요


Tu es ma princesse et je ne suis que ton serviteur

Ce deux jumeaux pitoyables, le destin les divisa

Juste afin de te protéger ma très chère soeur

Je deviendrai moi-même un démon pour toi


당신은 나의 공주님 그리고 나는 당신만의 하인

운명이 갈라놓은 가엾은 두 쌍둥이

소중한 나의 누이여, 단지 당신을 지키기 위해

난 악마가 되어 보이겠어요



Tandis qu’un jour je me rendais dans le pays voisin,

Je croisais cette ville revêtue de vert dans la cité

Sa voix adorable, son sourire et son merveilleux teint,

J’en suis tombé amoureux à peine l’avais-je regardée


어느 날 이웃나라에 갔을 때

녹색으로 물든 여자아이와 마을에서 마주쳤어요 

사랑스러운 목소리와 미소와 예쁜 모습에

첫눈에 나는 사랑에 빠졌어요


Mais si la Princesse, pour d’obscures raisons,

voulait que cette douce fille soit exécutée

Je dois obéir sans poser de question...

Je me demande pourquoi mes larmes ne cessent de couler


그러나 공주님, 모종의 이유로 당신은

이 귀여운 아이가 죽기를 바랐지요.

나는 의문을 품지 말고 그에 따라야만 해요.

그런데 눈물이 계속 흐르는 이유는 왜일까요


Tu es ma Princesse et je ne suis que ton serviteur

Ces deux jumeaux pitoyables, le destin les divisa

Aujourd’hui est servie de la brioche pour quatre heure

Tou sourire innocent, je ne m’en lasse toujours pas


당신은 나의 공주님 그리고 나는 당신만의 하인

운명이 갈라놓은 가엾은 두 쌍둥이

오늘 간식은 네 시간 동안 구운 브리오슈예요

당신의 무구한 미소가 있으면 난 아직 힘낼 수 있어요


Dans peu de temps la ville arrivera à sa fin,

Etant décimée par les mains de haineux citoyens

Et bien qu’ils persistent à dire que nous l’avons mérité

Si cela te menace, il me faudra donc les défier


얼마 안 있으면 이 도시도 끝이에요

가증스러운 시민들의 손에 박살나서요

그리고 비록 그들이 줄기차게 우리에게 업보가 있다고 주장해도

당신에게 칼끝을 겨눈다면 난 맞서야만 해요



“Tiens prend ce que je t’apporte, oui ce sont mes vêtements

Enfile-les et échappe-toi immédiatement.

Ne t’inquiète pas, nous sommes jumeaux et tout ira bien!

Je suis certain que les gens ne remargueront rien...“


“이걸 가져가. 그래, 내 옷이야.

갈아입고 나서 당장 빠져나가.

걱정 마, 다 잘 될 거야. 우린 쌍둥이라고.

저들은 아무것도 눈치 못 챌 게 분명해.“


Je suis la Princesse et tu n’es qu’une personne en exil

Ces deux jumeaux pitoyables, le destin les divisa

Tu serais désignée comme le Mal paraît-il

Nous partageons le même sang, je suis donc semblable à toi...


나는 공주 당신은 단지 추방자

운명이 갈라놓은 가엾은 두 쌍둥이

당신이 괴물로 비치도록 정해졌다면

나도 당신과 같아요, 같은 피를 나누고 있으니까요.


Il était une fois, dans un lieu très lointain

Des gens vivant dans un royaume inspirant la terreur

Et celle qui régnait sur ce monde chaque matin

N’était personne d’autre que mon adorable petite soeur


옛날 옛적 아주 먼 곳에

공포를 조장하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

매일 아침 이 세상을 통치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작고 사랑스러운 누이였어요 


Même si tu t’attirais les foudres des gens,

que le monde entier devenait ton ennemi

Sache que je te protègerai éternellement

Pour qu’au moins toi tu sois quelque part souriant


당신이 사람들의 분노를 산다 해도

온 세상이 당신의 적이 된다 해도

내가 영원히 지켜준다는 걸 기억해요

그러니 적어도 어딘가에서 웃으며 있어요


Tu es ma Princesse et je ne suis que ton serviteur

Ces deux enfants misérables, le destin les divisa

Et si un jour il nous était permis de renaître..


당신은 나의 공주님 그리고 나는 당신만의 하인

운명이 갈라놓은 불행한 두 아이

언젠가 우리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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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과 번역에 대한 모든 권리는 Poucet https://www.youtube.com/channel/UCFhQ3MOK6ioCiNP78v-NW9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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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캐러화하는 젊은이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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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러는 어떠한 기능을 가지는가

 

, 이러한 현실이 있다고 해서 캐러 문화야말로 왕따의 온상이다라 결론짓는 건 너무 순진한 처사다. 애초에 어떤 이점도 없는 문화가 이정도로 넓게 수용되리라 생각하기 힘들다. 캐러 문화의 이점에 대해서는 추후 논하겠지만, 우선은 결점을 검토해 보도록 하자. 역시 그 중 가장 큰 결점은 캐러 문화가 왕따 관계로 이어지기 쉬운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토 아사오는 왕따의 사회 이론’(카시와쇼보柏書房에서 왕따가 발생하는 메카니즘을 중간 집단 전체주의라 명명한다. 이 중간 집단 전체주의는 여러 동조 압력의 온상이며 왕따 역시 그에서 생겨난다.

캐러의 분담을 결정짓는 것 역시 이러한 교실이나 친밀한 집단이란 이름의 중간 집단 내부의 역학이다. ‘노부타를 프로듀스리는 메보다 100배 무섭다에서 그려진 건 이러한 집단 역동 법칙을 역이용하여 통제 하에 두려는 시도이다. 많은 중간집단에서 이런 캐러 분담의 역학이 작동하고 있다. 이 역학은 캐러의 다양성보단 정형화를 야기한다. 그 결과 구성원 중 누군가가 정형화된 캐러 중 하나인 왕따 캐러동네북 캐러를 분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캐러의 공존에 기반한 스쿨 카스트에는 교실 공간을 안정시키는 기능이 있다. 문제는 카스트 자체의 안정으로 목적이 전도되어 캐러 분담이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지고 만다는 점이다.

이때 캐러 분담을 야기하는 집단 역학 자체의 내부에 따돌림이 일찌감치 싹튼다. 이런 관점에서 캐러의 분화왕따의 사이에는 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캐러화의 장점에 대해 생각해보자. 가장 큰 장점은 소통의 원활화이다. 상대의 캐러를 알면 의사소통 패턴도 자동으로 정착된다. ‘캐러라는 코드의 편리한 점은 본 성격이 복잡하든 단순하든 캐러라는 틀에 똑같이 대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누마 후미아키에 따르면, 타인의 캐러는 수다스럽게 이야기하는 고등학생에게 본인의 캐러를 물어보니 의외로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캐러론 단 이 대답은 도저히 가늠조차 못하겠다는 의미는 아닐 터이다. 만약 정말로 자신의 캐러를 이해하지 못하면 캐러가 겹치는 것’ ‘캐릭터를 비집고 나오는 것을 지양하는 데 관심을 두는 것도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아마 그들의 잘 모르겠다아이들에게 어떤 캐러로 인식되고 있는지는 알지만 그게 내 성격이라 한들 와 닿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캐러의 자기인식은 이른바 성 정체성 인식과는 별개로 자아친화성이 낮다. 글 서두에 언급한 학생 사례들의 캐러를 연기하기 지쳤다는 현상의 원인도 상기 맥락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캐러는 자발적으로 연기하기보단 아이들의 소통 공간에서 자기인식당하고’, 연기당하는것이라 하겠다. 설령 이게 나 자신이라는 실감이 동반되지 않더라도 일단 캐러의 자기인식이 성립되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해방된다. ‘캐러를 연기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자각은 캐러의 배후에 있(다고 상정되)진정한 자신의 존재를 믿게 하고, 그것을 보호해주기까지 할 것이다.

연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은 캐러가 손상을 입어봤자 고작 거짓된 가면일 뿐이니 진정한 자신과는 상관없다며 딱 잘라 결론지을 수도 있다. 이와 더불어 아무도 인생에서 피해갈 수 없는 어떤 역할을 연기하는행위의 예행연습도 될 수 있다.

또한 서로의 캐러를 재귀적으로 인식하는 행위만으로 친밀한 소통을 영위하는 기분이 들게 해준다는 것이 캐러 개념의 좋은 점이다.

한때 나는 휴대폰 메일서비스를 통한 소통을 정보량이 적다는 의미에서 털끝만하다고 비유한 적 있다. 소통의 양상이 의미 있는 정보를 주고받는 행위에서 상호간 캐러의 윤곽을 확인하는 듯한 선문답으로 변질되어가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렇게 장황해빠진 소통의 정보량은 한없이 0에 수렴한다. 친밀함을 확인하는 데는 새로운 정보의 양이 적은 게 좋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캐러는 모종의 소통 요소가 응집된 유사인격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후술하겠지만, 해리성동일성장애(다중인격장애)의 인격 교대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워질 것이다. 해리성동일성장애 질환자는 (병인지 고의인지는 둘째 치고) 응석부리고 싶을 땐 유아교대 인격을, 공격성을 발휘하고 싶을 때는 난폭한 사람의 교대 인격을 드러낸다. 각각의 교대 인격은 틀에 박히고 깊이가 없는데다 성찰 능력도 불충분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교대 인격은 본래 인격에 준하는 가상의 존재라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러한 속성은 캐러에도 전부 들어맞는다.

상기 내용에서 미루어 나는 오늘날의 교실 공간이 일종의 다중인격 공간으로 구성된 게 아닌가 하는 가설을 제시하는 바이다. 캐러의 중복이나 이탈이 용납되지 않는 건 그 생태계가 만들어낸 미묘한 균형이 깨져 혼란에 빠지는 것을 막으려는 의지가 아닐까.

 

캐러의 재귀성은 무엇을 야기하는가

 

방금 지적한 캐러의 재귀성은 캐러라는 개념의 본질과 관련되었을 뿐 아니라, 일종의 피드백 회로를 통해 젊은이들의 정신 그 자체에 깊이 영향을 끼치는 듯하다. 그러한 면이 가장 현저하게 나타난 사례가 최근 수년간 연이어 발생한 묻지마 살인 사건이다. 특히 2008년은 묻지마 살인 사건이 연이어 일어난 해로 기억한다. 그해 3월에는 츠치우라 시와 오카야마 시에서, 6월에는 아키하바라에서, 7월에는 하치오지 시에서 똑같은 범죄가 되풀이되었기 때문이다.

사건의 용의자를 옹호하려는 의도는 털끝만큼도 없다. 하지만 그 배경에 자리한 요소들의 검토를 통해 ‘00년대마음을 보게 된다. 당시 아키하바라 사건에 대한 인식은 ‘‘파견 근무로 대표되는 젊은이들의 불안정한 근무 형태에 문제가 있다였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파견노동 제도의 재검토가 이어졌다는 점을 봐도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다른 이야기지만 당사자의 목소리보다 사건 하나를 계기로 정책에 손을 대는 정부의 구태의연함은 질려버릴 지경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적 배경만으로는 그들의 어긋난 자기애는 이해할 수 없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그들은 일종의 패배자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패배의 각인이 그들의 운명이며 노력이나 기회로는 바뀔리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듯 보였다. 자칫 자기혐오로 비칠 정도의 부정적인 의식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정도로 확신하는 모습을 볼 때 자기부정적 자기애라 함이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엇나간 자의식을 단순히 격차사회나 신자유주의의 산물로 간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이러한 의식의 배경에 있는 건 방금 전까지 지적한 소통 편중주의캐러 문화가 아닐까.

무슨 말인가 하니 다음과 같다. 묻지마 살인 사건의 용의자들의 공통점은 비행 경험이나 불량 써클에 소속된 경험이 없으며’, 따라서 오히려 학교나 사회에서 소통 약자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에는 빈곤이나 장애 이상으로 소통 능력의 부재를 불행한 것으로 취급한다. 다시 말해 개인의 불행의 양상은 다양하지만 그 원인이 곧잘 소통의 문제로 비약된다는 뜻이다.

가령 아키하바라 사건의 용의자 카토는 자신의 인터넷 게시판에 못생겼으면 연애할 권리가 없다는 문장을 빈번하게 써 왔다. ‘못생겼다’, ‘인기가 없다는 말에는 결정적으로 자신이 소통 약자이며 그건 어쩔 도리가 없다는 체념마저 담겨 있다.

 

(참고로 카토는 2010년에 시작한 공판에서 게시판에서는 인기 없는캐릭터를 연기했다” “사실은 친구도 많았다는 등 매스컴을 통해 비친 이미지와는 상이한 증언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일련의 증언에서 나는 강한 편향성을 느꼈다. 자신의 범행 동기에 사회적 배경이 반영되었다는 것을 되도록 회피하려는 듯 보였다는 말이다. 자신의 죄를 자각하면서도 그 원인을 양육 환경이나 사회적 억압에서 찾는 것만은 하지 않으려는 강한 결의가 그에게 있는 게 아닐까.)

 

익명성과 캐러

 

일련의 묻지마 살인 사건의 또 다른 공통적인 특징은 익명성이다. 어느 경우든 용의자들은 도장으로 찍어낸 듯 똑같이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고 말했다. 마치 인터넷에서 천편일률적인 양식의 문구(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줬다. 상대는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반성하고 있다.)를 읊듯 말이다. 살인의 동기조차 어딘가에서 빌려서 말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한때 젊은이들의 흉악 범죄는 90년대의 사카키바라酒鬼薔薇 사건[각주:1]처럼 용의자의 자기표현과 더불어 존재를 증명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당시의 특이한 범행성명문에서도 그를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련의 묻지마 살인 사건에는 그러한 표현 충동조차 한없이 희박하다. 나는 누구라도 상관없었다는 말이 도무지 피해자만을 지칭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누구라도 상관없던건 오히려 그들 자신이 아니었을까. 그렇다. 적어도 내게는 “(이런 짓을 하는 건)내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상관없었다는 중얼거림이 확실하게 들렸다.

일종의 자폭 테러의 성향을 띤다는 게 그들이 저지른 범행의 공통점이다. 그들은 상당히 치밀한 범행 계획을 세웠으면서도 범행 후 도주 경로는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 마치 진작 체포되어 극형에 처해질 것을 바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포자기식이었다. 거기다가 그 정도의 위험을 무릅쓰는 와중에 그들은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며 절망하고 있지 않았는가.

지금 시대에는 범죄란 작금의 불완전한 사회 시스템이 일정 확률로 내포하는 위험 내지 버그로서 발생하며 그때마다 법과 제도에 의거하여 엄숙히 처리(디버그)된다. 그들 역시 그러한 버그들 중 하나에 불과하며, 운명이나 필연성과는 관계없는 순수한 확률의 문제이다. 확률의 문제인 이상 그들은 얼마든지 교체될 수 있는 존재, 익명의 존재를 면할 수 없다.

자신이 확률에 의거해 치부를 당한 익명의 존재라는 자의식. 이건 꼭 패배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윗세대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쨌든 한 발짝 내딛어 보자, “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지 않느냐. 젊은이들을 대신해서 내가 대답하자면,

그야말로 정론이고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말씀조차 예상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해보면 잘 풀릴지도 모른다. 방법의 힌트도 길가의 차이는 돌멩이만큼 인터넷에 얼마든지 굴러다니고 있다. 남은 건 할 의욕뿐이다.‘ 우리들 역시 몇 백 번을 스스로에게 되뇌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인지하고 말았다. 이기는 것도 지는 것도 결국 확률의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러면 이길 확률에 걸어 보라? 뭘 모르신다. 만사가 확률의 문제인 이상 이기든 지든 영원히 안심할 순 없다고? 아무리 성공한들 나는 익명인 채 의연하게 확률의 문제로 치부될 테니까.”

 

사람에게는 아마도 행복의 재능이라는 게 있다. 우연히 성공한 체험을 두고 이것은 필연적인 운명이었다고 자신에게 납득시키는 재능의 이야기다. 필연성을 향한 그러한 신앙은 자신을 교체할 수 없는 고유한 존재라 간주할 확신을 기반으로 한다. 그것을 신앙이라 한 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거기에는 아무 근거가 없다.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그 신앙을 버리고 있다.

필연성이나 고유성의 이름으로 익명성을 회피할 수 없다면, 이제 도망칠 길은 없는 걸까. 이 시점에서 요청되는 게 캐러이다. 사실 자신을 교체할 수 없다는 고유성은 추궁해보면 딱히 근거는 없다. 기술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가령 정신분석에서는 그렇게 근거 없는점이야말로 인간 주체를 지탱한다고 본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부정신학否定神學이다. 추후 언급할 이토 고[각주:2]의 지적으로 유명해진 캐릭터キャラクター와 캐러キャラ의 구별에 관해 말하자면 캐릭터는 이러한 고유성을 어딘가에 내재하고 있다. 그러나 캐러에는 문자 그대로의 고유성은 빈약하다. 라캉의 정신분석을 부정신학으로써 비판한 아즈마 히로키가 확률론에서 캐릭터의 이론화로 나아간 것은 필연적인 흐름이다.

그러나 이 확률적인 세계에서는 그러한 고유성을 믿는 건 불가능하다. 모든 것이 우연이라는 신앙은 이 하나뿐인 세계의 단 하나뿐인 자신이라는 필연성을 향한 신앙을 토대부터 헤집어버린다. 그렇다. 요컨대 이 두 개의 신앙은 칸트 이래 우연과 필연의 안티노미의 문제로 귀결한다. 즉 어느 쪽에도 근거는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어쩌다 현대에 와서 제반 사정에 따라 모든 것은 우연의 세력이 우세가 되었을 뿐이다. ‘모든 것은 우연교의 세계관에 따라 개인은 교체 가능한 존재로 익명화됨과 동시에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세계의 복수複數이다. 같은 말이지만 세계의 다중多重라 해도 무방하다. 이 두 가지 변화는 표리일체의 관계이다. 개인의 익명화가 세계의 복수화를 요청하고 세계의 복수화는 개인의 익명화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여러분은 커다란 성공 체험을 겪은 순간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은 없으신가. ‘이야, 이번에는 어쩌다가 잘 풀렸어. 하지만 다음 생에도 똑같이 성공할 수 있을까하고 말이다. 고백하자면 실은 나는 자주 그런 감정이 밀어닥친다. 그렇다. 바로 이 순간이다. ‘나의 세계가 복수화되고 가 익명화되는 순간. 만약 마음속으로 인생은 한 번뿐이라 믿고 있다면 성공 체험을 오롯이 맛보며 내일부터의 자신에게 이어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서론이 길어졌다만 이 모든 것은 우연교와 캐러는 꽤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익명으로 치부된 개인의 마음에 고유성과는 별개의 방식으로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것이 캐러이다. 기술할 수 없는 고유성과는 달리 캐러는 기술할 수 있다. 오히려 캐러야말로 늘 기술되지 않으면 존속할 수 없는 존재이다.

또한,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캐러의 또 하나의 특징은 복수의 세계 어디에 있어도 그 캐러의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여기서 곧장 도라에몽의 타임슬립물을 떠올린 당신은 제대로 짚었다). 방금 전 밝힌 나의 개인적 감상에 근거하여 말하자면 다음 생에도캐러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는 중에 캐러를 유지시켜주는 것이 바로 소통의 힘이다. ‘대신할 수 없는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자신에 상응하는 신앙을 잃은 개인이 마음의 안정을 캐러에 의탁하려 하면 캐러의 기술記述=상호확인을 가능케 하는 재귀적 소통을 향해 반복해서 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 외의 수단은 없다. 단지 소통만이 자신의 캐러=재귀적 동일성을 유지시켜줄 뿐이다.

그것은 우연성과 익명성이라는 이른바 유동성의 극한까지 자신을 노출시키며 간신히 자의식의 동일성과 연속성을 이어붙이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그런 의미에서 캐러의 획득은 임시대피소로서 순간의 안심을 부여하긴 한다. 그러나 그 대가도 결코 작은 것은 아니다.

대가란 무엇인가, 우선 첫째로, 캐러화는 성장과 성숙을 저해한다. 어떤 캐러든 그 기술이 늘 소통에 동반하는 이상 캐러로부터의 이탈은 대부분 본능적으로기피된다. 그래서 한번 캐러가 확정되어버리면 거기서 하차하는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언젠가 완벽한 소통은 성장을 저해한다고 쓴 적이 있다.(문학의 단층, 아사히신문 출판) 완벽한, 즉 오해나 잡음이 섞이지 않은 소통은 완벽한 상호이해를 야기함과 동시에 그렇게 이해되고 만 자신’=캐러의 강한 고착 역시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고착이야말로 개인의 변화와 성장을 가로막는 원흉이다.

아까 언급한 자기부정의 자기애 역시 아마도 여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모종의 소통을 통해 부정적인 자기 이미지(음지 캐러, 인기 없는 캐러 등)에 고착된 개인은 부정적인 자기 이미지의 현실성(당위성)을 재확인하는 것으로밖에 자기애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변으로부터 부정적인 캐러로 상정되었음에도 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연기하는 듯 보이는 개인이 적지 않은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의도치 않은 캐러를 맡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런 캐러라도 한번 잃어버리면 거창한 표현으로 이 세계에 자신이 있을 곳은 없어진다. 그것은 원치 않는 캐러를 굳이 맡는 것보다 아득히 두려운 사태이다.

이때 자해나 자기부정을 비롯한 자기 자신과의 소통 역시 마치 캐러를 확인하는 재귀성을 야기한다. 카토가 작성한 자문자답의 행태를 떠올려보자. 정신과의사로서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일단 이러한 자해적인 캐러 설정이 성립되고 나서는 긍정적인 자기애를 살려 회복시킬 수 있을지 확고한 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문제는 안전이나 자유의 적당한 충족과 맞바꾸어, 끊임없이 사람들이 익명화를 향하는 것 말곤 선택의 여지가 없는 현대 추세에 저항하도록 굳이 고유성을 옹호하는 지극히 어려운 문제임이 틀림없다. 다르게 말하면 사회공학적 의 추세(자연과학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다)에 대응하여 얼마나 인문적 의 입지를 확보해야 하는지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그렇다고 하면 눈앞의 상황은 절망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해 적어도 이론적으로 명쾌한 답은 보이지 않는다. 자기애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재귀적 소통을 통해 유지되는 자기동일성이라는 사실이 이미 성립되었다면 그 자체를 두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는 어렵다.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급의 이점도 상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여기서 내가 언급해 둔 자기동일성이라는 말을 주의했으면 한다. 사람들 입에 수없이 오르내리는 이 개념은 전적으로 명백하지 않다. ‘자신이 곧 자신이라는 개념의 근거는 놀라우리만큼 덧없다.’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해체하기 쉬운 존재인지 하는 임상적 사실로부터도 접근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는 그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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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번역문에 대한 모든 권리는 출판원 ちくま文庫와 저자 斉藤環에게 있습니다

  1. 정식 명칭은 고베 아동 연속 살상 사건神戸児童連続殺傷事件. 1997년에 아즈마 신이치로가 저지른 살인 사건이다. 범인이 쓴 쪽지에 적힌 사카키바라 세이토酒鬼薔薇聖斗라는 이름에서 따와 사카키바라 사건으로도 불린다. [본문으로]
  2. 伊藤剛(1967~). 만화비평가. 주요 저서로는 『데즈카는 죽었다テヅカ・イズ・デッド』가 있다. [본문으로]

제 1장 캐러화하는 젊은이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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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 소설로 보는 캐릭터의 기원


원래라면 여기서 스쿨 카스트나 캐러의 사례를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필자의 재량으로 창작물 속에서 사례를 찾기로 한다. 과장이 포함된 표현이야말로 캐러의 기능이나 의미를 검증하기 쉽다는 생각에서 내린 선택이다. 단 여기서 거론하는 세 작품은 각각의 저자가 경험해 온 현실 교실 공간의 정치를 생생하게 반영했다고 생각하기에 일종의 다큐멘터리로서의 가치도 충분히 있다고 간주해도 될 것이다. (이하 인용 내용은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들을 다루고 있다)

우선 약관 15세의 나이에 문예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여고생 작가 미나미 나츠의 ‘헤이세이 머신건즈「平成マシンガンズ」(카와데쇼보신샤河出書房新社 출판) 이다. 이 책에서는 ’캐러를 빠져나오려는(자신의 캐러가 요구받는 언동의 유형을 일탈하는)‘ 것의 공포가 반복하여 그려진다. 주인공 토모미는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친하게 지내던 그룹의 친구들에게 ’따‘ 당한다(무시당한다). 알리고 싶지 않던 가정사를 추궁 받아 평소 연기하던 ’수수한 아이‘ 캐러와는 다른 반응을 보여 버린 게 원인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카스트가 엄연히 지배하는 교실 공간에선 자기에게 주어진 ’캐러‘를 철저하게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의 ’왕따‘ 담론에서는 그다지 다뤄진 적 없는 부분이다. ’헤이세이 머신건즈‘ 의 첫머리 즈음에서 소개하고 있는 ’아이자와 군‘ 의 에피소드는 더욱 비참하다. 

줄곧 ‘동네북 캐러’ 였던 아이자와 군은 다른 학생들에게 비웃음을 당해도 저항하지 못하고 실실 웃고 다니는 남자아이였다. 그러나 그가 지은 하이쿠가 지역 문집에 입선해버리고, 그 사실이 알려지자 반의 분위기는 격변했다. 그렇다, 아이자와 군은 주제넘게도 ‘동네북 캐러’를 뛰어넘어버린 것이다. ‘벌’ 로써 반 전원에게 철저히 무시당한 아이자와 군은 등교 거부까지 하게 된다.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시로이와 겐의 소설 ‘노부타를 프로듀스’ 는, ‘캐러를 어떻게 내세우는가’를 중심 테마로 하고 있다. 주인공 키리타니 슈지는 누구에게든 차갑게 거리를 두며, 스쿨 카스트 최상위 ‘인기인 캐러’를 유지할 수 있도록 밤낮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는 고등학생이다. 키리타니는 언제부터인가 문득 전형적인 ‘왕따당하는 캐러’ 전학생 노부타(코타니 노부타)와 관계를 맺고 그를 인기인으로 끌어올리려 획책한다. 그의 의도는 들어맞았고 노부타는 일약 인기인이 되어 ‘따돌림당하는 캐러’에서 ‘짓궃게 괴롭힘당하며 사랑받는 캐러’로 승격한다. 그러나 얄궃게도 키리타니는 자신의 캐릭터 연출에 실패하여 부지런히 쌓아올린 위치에서 추락하게 된다.

현역 고등학생이 휴대폰으로 쓴 소설이라 화제가 된 코도 시이의 ‘리는 메보다 100배 무섭다’ 역시 ‘캐러’를 둘러산 이야기이다. 제목의 의미는 ‘괴롭힘いじり’은 ‘따돌림いじめ’보다 훨씬 비참하다는 의미로 보면 된다. ‘노부타를 프로듀스’ 와 발상은 정반대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지금은 잠시 제쳐두자.

중학교 시절, 줄곧 ‘괴롭힘 당하는 캐러’ 로서 고생해 온 ‘나’는 평화롭고 즐거운 고등학교 생활을 목표로 자신의 캐러를 짜내려 노력을 거듭한다. 그런 ‘나’의 일상은 수면 아래 끊이지 않는 관심과 전략의 연속이다. 자신과 상대방의 캐러를 인식하여 캐러끼리의 균형도 의식하며, 캐러가 겹치거나 자신의 캐러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나’의 전략 중 하나는 자신이 ‘괴롭힘 당하는 캐릭터’ 가 되기 전에 다른 목표 대상을 내세워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고생한 보람이 있어 적당한 동급생 한 명을 ‘괴롭힘 당하는 캐러’ 로 몰아넣지만 결국 그 전략이 그의 명을 재촉하고 만다.

‘리는 메보다 100배 무섭다’ 가 흥미로운 이유는 고등학생 집단 내부의 캐러 균형이나 생성 양상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픽션으로서의 과장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엔 발매 당시 아직 고등학생이던 작가의 생생한 일상 감각이 반영되어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이상의 사례들로부터 우리는 스쿨 카스트와 캐러 생태계가 지극히 밀접하게 관련된 게 지금의 현실임을 알 수 있다.


캐러는 어떻게 침투했는가


다시 말하지만 소통 격차가 야기한 스쿨 카스트는 ‘캐러의 생태계’ 이기도 하다. 교실이란 폐쇄 공간 안에서 학생들은 여러 가지 캐러를 나누어 연기하길 강요받는다. ‘누군가’ 명령하는 게 아니고, 단지 ‘분위기’ 가 그리 시킬 뿐이다. 오기우에 치키는 학교 공간을 ‘끝없는 캐러 전쟁의 무대’ 로 간주한다. ‘비참한 왕따 아이’ 가 되지 않으려고 ‘재미있는 동네북 캐러’ 로 남기를 선택하면 ‘괴롭히는 캐러’ 보다 약자 위치에 놓인 채 기약 없는 동네북을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캐러 전쟁’에서 패배한 자가 ‘어두운 캐러’ ‘기분나쁜 캐러’ 와 같은 ‘동네북 캐러’ 가 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오기우에 치키, ‘인터넷 따돌림’ 中) 이렇게 생성되어 온 여러 캐러의 공존은 어떤 종의 불문율을 토대로 정확히 행해진다. 예를 들자면 ‘캐러가 겹치는’(하나의 계층집단 내에 비슷한 캐러가 두 명 이상 있는 것) 일도 그렇다. ‘캐러를 비집고 나오는’ 등의 사태는 엄격히 기피된다. 만약 이를 위반해버리면 그것만으로도 새로운 따돌림을 유발할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야말로 캐러는 생존 경쟁의 법칙과 다름없다.

학교라는 공간은 폐쇄적인 교실 내의 개인에게 캐러로 굴 것을 요구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각 캐러에 대해 독특한 방법으로 계층구조(지배구조)를 부여해간다. 학교 공간에 있는 이상 그 지배구조로부터는 벗어날 수 없어 보인다. 그곳에서 학생들은 ‘강한 캐러’ 와 ‘약한 캐러’로 강제적으로 분류된다. 캐러가 겹치거나 부정적인 캐러를 부여받은 경우 변경이나 교환을 하지 않으면 ’훈훈한 자리‘ 로 가기는 어렵다. 실패하면 ’동네북 캐러‘ 로 전락하고 만다. (’인터넷 따돌림‘ 中)

이러한 캐러화의 압력을 조장하는 것이 휴대폰을 필두로 한 ‘인터넷 문화’ 이다. 오기우에는 ‘초등학생의 약 3할, 중학생의 약 6할, 고등학생의 약 9할이 휴대폰을 소유하고 있다’ 고 제시한다. 그 중 대부분은 휴대폰 메일이나 사이트 열람기능을 이용한다. 거기다가 초등학생의 약 6할, 중고등학생의 약 7할이 컴퓨터로 인터넷을 이용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이 매체들은 현실의 인간관계가 덧씌워져 기능하는데 원래부터 친밀한 상대와는 빈번하게 메일을 주고받는 한편 교실 안의 따돌림 관계는 인터넷 상에서도 그대로 구현된다. 보통 인터넷 공간은 불특정 다수의 익명 상대와의 유동적인 관계성을 연상하기 쉽지만 휴대폰은 오히려 현실 인간관계를 반영한다. 이는 현실 소통의 문턱이 낮아지거나 다중화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인터넷이나 휴대폰을 필두로 한 소통 네트워크의 진화와 침투는 거의 혁명적인 변화였다. 그러한 인프라의 발전과 함께 사회 전체가 소통 편중주의로 침잠해 간 건 반쯤 필연적인 흐름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경험이 아이들의 사회에도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러한 와중 소통의 양상도 변해갔다. 현대 소통 기술 중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속성은 다음과 같을 터이다. ‘메세지 내용의 짧고 가벼움’ ‘답문의 즉시성’ ‘빈번, 원활한 의사 교환’ ‘웃음요소’ ‘머리글자 조어 등 메타 메시지(상징・은유적 표현)의 사용빈도’ ‘캐러의 명확함’ 등. 그렇다면 과연 캐러와 소통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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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번역문에 대한 모든 권리는 출판원 ちくま文庫와 저자 斉藤環에게 있습니다.

번역 - 일본어/기타 2018. 7. 4. 21:16

인간이야말로 최강의 인터페이스이다


ー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저번 강연회와 로봇 연극, 재밌게 잘 봤습니다. 그리고 ‘일본 과학 미래관’에서 발표하신 안드로이드의 시연도 관람했습니다만, 마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대답하는 게 매우 경이로웠습니다. ‘안드로이드도 여기까지 이르렀나・・・’ 싶었습니다. 소박한 의문입니다만, 애초에 어째서 우리들은 인간형 로봇에 흥미를 가지게 된 걸까요?

이시구로 사토시(이하 이시구로) “‘사람은 사람을 인식하는 기능이 있다’ 는걸 아는 것이 일단 중요합니다. 아니, ‘사람의 형태를 한 대상이 더 인식하기 쉽다’ 고 해야겠군요. 오늘날의 스마트폰이나 휴대폰은 인간에게 이상적인 인터페이스가 아닙니다. 가장 이상적인 인터페이스는 인간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기술이 발전할수록 세상의 여러 가지 사물들이 인간처럼 변모한 겁니다. 그리고 그 ‘인간다워짐’ 의 절정에 다다른 것이 안드로이드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인터페이스는 인간 그 자체입니다.」 이 발언에 의문을 느끼는 사람도 많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실제로 현재 우리 생활에 관여하는 공업용 로봇이나 휴대전화는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시구로 씨의 발언에서 설득력을 느꼈습니다. 사실은 이 발언을 뒷받침하는 ‘페그 인 홀peg-in-hole’ 실험이라는 게 있습니다. 인간이 봉을 구멍에 넣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였을 때와 똑같은 시퀀스를 기계가 하는 것을 보였을 때를 비교한 실험으로, 인간이 할 때는 아이들은 흉내 내지만 기계의 경우 흉내 내지 않는다는 귀결입니다. 즉 아이들은 흉내 내는 대상에 ‘인간다움’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시구로 씨는 강연회에서도 인간형 쿠션 ‘허그비’ 나 인간형 휴대전화단말 ‘엘포이드’를 소개하며 “인간이 가장 인식하기 쉬운 인터페이스는 사람이다” 라 역설하였습니다. 그에게는 모든 사물들이 인간화되는 것이 필연적인 미래일까요?

우미네코자와 메론, <내일은 기계가 사람이 된다> 中

번역 - 영어/기타 2018. 5. 22. 21:39

독일 철학은 비범한 지성의 결과이다

종교와 철학 체계를 그들의 드문 강점인 합리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독일 철학의 관례이다. 다만 그 몰인정한 기준의 적용은 부당하다. 그들 자신이 사실이길 열망하며 그 신념을 유지하고, 대립하는 다른 견해 – 그것이 얼마나 명백하고 불가피하든 –를 이해利害에 따라 사실이라 하길 금하는 기준의 이야기다. 그러나 종교와 철학 체계가 사멸하거나, 사람들이 (시간의 경과나 주입된 학습에 따라) 종교와 철학 체계의 진리에 대한 질문이 우리의 삶의 문제와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되어 그 영향력에서 이탈할 때에도, 그것들은 관심을 전부 잃지는 않는다. 그리고 처음으로 ‘불신자’ 에게 자신들의 미덕을 명시한다. 그는 그것을 인류 지성의 표현으로 인식한다. 물질세계에 대해서는 잘못 말하고 있을지언정 – 마치 예술이 으레 그렇듯 – 그들이 두른 관점과 정신은 진실하다고 받아들인다. 세상의 그 어느 것도 – 진리마저도 – 인류 지성보다 흥미로울 수는 없는 만큼, 이 터무니없는, 혹은 구식의 종교와 철학 체계들은 사람들에게 반가운 대상이 된다. 그들의 오류에 내재하던 자극이 희석되며 더 이상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위협이 아니게 되고, 저술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얻게 되었다. 기존의 진리가 고전하던 바로 그 굴절 덕택에 말이다.

독일 철학은 비범한 지성의 결과이다. 무언가에 달아오르는 것은 쉽다. 절대적인 의지와 혼돈 상태에 대한 믿음-심지어는 그 가능성을 둘러싼 맹목적인 논쟁-은 이성을 가진 동물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망 받고 배우고, 근면해지고, 도덕적으로 되고, 크리스천이 되고, 심지어는 피할 수 없는 실재와 관습의 장막을 걷어치우고, 우리 앞의 실존을 점유하길 그치지 않는 모든 관례적인 현상을 무릅쓰고 절대적 의지와 자유를 관통하고, 그것들이 설득력 있게 진정한 현실을 향하게 하는 것, 이것들이 바로 비범한 지성이 한 일이다. 존재 이래 불순물이 낀 원시적인 영혼의 깊이를 격세유전식으로 회복한 놀라운 성취이다. 독일 철학에서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자아ego, 곧 세상에 태어난 이후 온갖 회의로 얽힌 영혼이란, 현대에 다시 백주 대낮에 끊임없이 우리를 따라다니며 그 허깨비와 같은 웅변으로 ‘원시적 자아가 아니라 이 세계가 허깨비다’ 라 설득하려 드는 존재이다.

조지 산타야나, <독일 철학의 자기 본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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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일본어/기타 2018. 5. 22. 21:37

‘무리 없이 번역할 있는 사람’ 과 ‘좀처럼 번역하기 힘든 사람’

질문자 H : ‘번역가가 어울리는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 는 이야기 말입니다만, 작가의 관점에서 ‘무리 없이 번역할 있는 사람’ 과 ‘좀처럼 번역하기 힘든 사람’ 같은 경우도 있습니까?

무라카미 : 있지요.

질문자 H :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번역하기 힘듭니까? 작품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쉽게 할 수 있겠구나’ ‘힘들겠구나’를 알 수 있습니까?

무라카미 : “이건 내가 번역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소설과 “이건 정말 번역하기 싫다” 고 생각이 드는 소설은 확실히 있군요. 그건 그 소설이 ‘뛰어나다’ ‘뛰어나지 않다’ ‘취향이다’ ‘취향이 아니다’ 같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맡을 수 있다” “맡지 못하겠다” 의 여부가 굉장히 크게 작용하지요. 상성의 문제도 있고요. “이건 훌륭한 소설이지만 나는 정말 번역하기 싫다” 든지 “번역할 수 없다” 의 경우도 많이 있어요.

질문자 H : 평소 좋아하는 작가라면 순탄하게 작업할 수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무라카미 : 일단은 그렇습니다. 단,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가령 시바타(공저자 시바타 모토유키) 선생께서 자주 번역하시는 폴 오스터 말입니다만, 독자로서는 좋아하지만 ‘번역하고 싶은지’ 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 관계로, 특히 저는 작가다보니 ‘번역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게 있는가’ 의 여부가 꽤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존 어빙의 장편 하나를 번역했습니다만, 어빙에게서 ‘배우고 싶다’ 느낀 부분이 꽤 컸지요. 카버(레이몬드 카버)도 그렇고 팀 오브라이언도요. 팔십 년대 미국 작가 중 가장 필력이 좋았던 사람을 꼽는다면 오브라이언, 어빙, 카버라고 생각합니다. 그 세 사람에게서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고, 자양분을 흡수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번역한데엔 그렇게 생각한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시바타 : 실제로 번역하신 뒤 “의외로 배울 점이 없구나” 느낀 작가는 있으십니까. (웃음)

무라카미 : 아직까지는 없어요, 그런 사람은요. 무슨 작품이든 분명 배울 부분은 있지요.

시바타 : 처음 읽었을 때 느낀 감상에서 그렇게 벗어나진 않지요?

무라카미 : 그렇지요. “아... 이런 거 안 하는 게 나았어. 시간과 손끝의 낭비였어.” 라 할 일은 없어요.

무라카미 하루키, 시바타 모토유키 <번역야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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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의 일요일春の日曜の一日

夫天地者 萬物之逆旅 光陰者 百代之過客(부천지자 만물지역려 광음자 백대지과객) 
대저 천지는 만물이 묵어가는 여관이요 세월은 백대의 나그네

而浮生若夢 爲歡 幾何(이부생약몽 위환 기하)
떠도는 인생 꿈과 같으니 기쁨이 얼마나 되나?

古人 秉燭夜游 良有以事 (고인병촉야유 양유이사) 
옛사람들이 촛불을 잡고 밤에 노닌 것도 실로 까닭이 있었음이라

況 陽春召我以煙景 大塊暇我以文章 (황 양춘소아이연경 대괴가아이문장) 
하물며 화창한 봄날이 아름다운 경치로 나를 부르고 조물주가 나에게 문장을 빌려줬음에랴

이백이 지은 문장에 드러난 봄을 읽다보면 이제 나는 저절로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다. 거기다 오늘은 일요일이고 날씨도 쾌청하다. 곧장 어제 약속한 하야시의 집을 방문했다. 온몸이 봄의 고동으로 들썩이고, 다리는 호기롭게 대지를 밟는다. 고풍스러움 그 자체인 하야시의 집 에 들어서자, 만면에 기쁜 빛을 띤 채 그는 들고 있던 이젤을 단단히 챙겨 밖으로 뛰쳐나왔다. 키가 다른 두 사람이 똑같은 이젤과 똑같은 목탄지를 손에 든 채 하얀 운동화를 신고 제2중학교 부근을 목적지로 하여 출발했다. 가는 길에 어딘가 학교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어 하야시에게 물어보았더니 “*훈맹원ー아니 보육원이겠지.” 라 대답했다. 과연 얼굴이 새까만 이삼십 명의 아이들이 제각각 한 쪽에선 세발자전거를 타고 다른 쪽에선 그네를 타며 놀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얼굴 상태가 원만하지는 않다. 새삼 부모님께 감사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길 한쪽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가로질러 나아가니 나무들 사이로 제2중학교의 교사校舍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사팔눈으로 본들 제2중학교 교사는 기후岐阜중학교 교사보다 훌륭하다. 설비부터 시작해서 모든 게.
제2중학교 교문을 지나면 묘지와 맞닥뜨린다. ‘여기 우리 할머니가 묻혀 있다’ 는 생각을 하고 있자, 갑자기 작년 가을 사카호기坂祝 땅에서 나뭇잎과 함께 쓸쓸히 져 버린 누님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위독한 와중에도 내게 걱정스럽게 “학교를 쉬면 안 된다” 며 돌아가라고 소리치던 누님의 목소리도 귓가에 맴돌았다. 아련한 생각을 잊으려고 초원에 풀썩 주저앉았다. 멀리 북쪽을 바라보니 낙성식을 눈앞에 둔 제2카노加納소학교가 선명한 주홍 빛깔을 발휘하고 있다.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엷은 세피아 색으로 배경을 수놓고 있다. 그를 원경遠景으로 놓자 중경中景으로는 왼편에 조선인들의 가옥이 있고 옆에는 보리밭의 녹음이 조화를 이룬다. 그 사이를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발밑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아, 그야말로 충분한 절경이다. 나는 연필을 집으려 했다. 그러나 하야시는 고개를 젓고는, 나와 등진 채 자리를 잡고 연필을 꺼낸다. 갑자기 뒤에서 자전거 벨이 울린다 싶더니 아이들의 무리가 “야, 너희들 여기 있었느냐?” 운운하며 자전거를 몰고 왔다. 의아한 채 가만히 있자니 다가와서는 “이야,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하고는 사라져갔다. 아무리 봐도 연배는 얼마 나지 않음이 틀림없다. 바로 옆까지 와서야 다른 사람인 줄 알았으니까. 조금 있자니 돌아와서는 한 번 더 사과하고 떠났다. 시골 사람들의 공손함을 살짝 느꼈다. 아무리 떨어져 있다 한들 기후에서 0.5리 거리인데 기후 사람들의 정서와는 천양지차다.
혼자서 감상에 빠져 있자니 하야시는 이미 그림에 몰두해 있다. 하야시는 머리가 좋아서 구도를 빨리 선정한다. 나로선 턱도 없다. 한 장에 칠 전짜리 목탄지도 똑같이 이 년 묵은 한 장에 십 전짜리 목탄지보다 상태가 나쁘다. 아무리 색을 덧칠해도 그에 비례해서 종이에 스며들지 않는다. 종국에는 환멸감과 비애가 느껴졌다.
시계를 보니 그리기 시작한지 두 시간 반이 지나 열두 시를 넘겨 있었다. 그림은 대충 완성되었다. 봄날 햇빛은 길고 한가로웠지만 우리들의 공복 사정은 그렇지 않다. 하야시는 늘 “배고픔을 초월하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 고 말했는데 실로 그 말은 영험하기 그지없어, 짐을 챙겨 돌아갈 무렵에는 앉아 있을 때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몸 상태는 다소 나빠졌지만 말이다. 돌아가는 길에 제2중학교에서 운동을 하자고 정한지라, 담장을 넘어가 운동장에 있던 원반을 던지며 주고받았다. 어떻게 해도 손에서 원반이 빠져나가는지라 “이러니까 선수가 따로 있는 거지. 다 잘 던지면 선수도 있을 수 없는 법이니까.” 라 생각하기도 했다. 또 카노에서는 연이 유행인지 내 키보다 큰 것만 둘이서 함께 날렸다.
운동장 근처에 올라와 있기만 했는데 열 시 가까이 되었다.
놀이는 끝났지만 집에 돌아가기가 싫었다. 공복인데다 무거운 짐까지 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한 시간 후 우리는 다리를 질질 끌며 걸어갔다.
아, 즐거우면서도 서글펐던 봄날 하루여.

*訓盲院, 농아와 맹아들을 가르치기 위한 기관

코지마 노부오, <어느 봄날의 일요일春の日曜の一日>

코지마 노부오 초기작품집小島信夫初期作品集 공원, 졸업식 公園 卒業式 수록


제 1장 캐러화하는 젊은이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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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공간에서의 캐릭터


2010년 11월 20일자 조간 아사히신문에 '캐릭터, 연기하기 지쳤다キャラ、演じ疲れた' 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되었다. 최근 수년 간 아이들이 '캐릭터' 란 단어를 쓰는 것을 자주 듣긴 했다. 그러나 당사자들이 그렇게 캐릭터를 계속 연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세상에 지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 기사의 요지였다.

다음은 그 기사를 인용한 것이다.


"'저 캐릭터를 바꾸고 싶어요. 이대로는 제가 바보가 될 것 같아요.' 산인 지방[각주:1]의 어느 중학교에 설치된 상담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임상심리사 이와미야 케이코 씨에게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방문했다. 그녀는 친구들로부터 딴죽을 걸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신비한 느낌의 천연 캐릭터天然キャラの不思議ちゃん[각주:2]' 를 연기해 왔지만 본연의 자신과는 동떨어진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 지쳐 고등학교에 입학하면 캐릭터를 바꾸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그밖에도 '괴롭힘당하는 캐릭터いじられキャラ[각주:3]' 를 연기하여 반에서 자신의 입지[각주:4]를 만든다든지 '독설 캐릭터' 라 불리던 여자아이가 "최근에는 제가 독설을 하길 주변 아이들이 기대해서 힘들어요" 라 고민하는 등의 사연들이 이어졌다. 아니나다를까 그 '롤모델' 의 출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주고받는 대사와 행동이었다."


요 몇년 동안 학교 공간에서의 캐릭터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여러 입장에서 지적되고 있다. 어느 조사에 따르면 교실에는 학생 수만큼의 캐릭터가 존재하고 각기 미묘하게 차별화되어 '캐릭터가 겹치지 않도록' 조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로 '괴롭힘당하는 캐릭터' '오타쿠 캐릭터' '천연 캐릭터' 등이 알려져 있다. 어떤 캐릭터로 인식되느냐에 따라 아이가 교실 공간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캐릭터 없이는 더이상 평화롭고 즐거운 학교 생활을 지속할 수 없다. 이것은 호들갑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다. 그렇다, 이제는 교실 공간은 '캐릭터 생태계' 라 말할 양상을 드러내기에 이른 것이다. 약육강식의 먹이사슬이 존재하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 위한 '서식지 격리[각주:5]' 가 있다. 그렇다면 교실 공간을 지배하는 '적자생존' 의 원리는 어떤 것일까.

교실에서의 캐릭터 성립을 고찰할 때 이해해둘 배경 지식이 두 개 있는데, '스쿨 카스트' 와 '커뮤니케이션 격차' 이다. 스쿨 카스트부터 설명해보자. 교실에는 꼭 여러 개의 그룹이 있다. 이들 그룹 간에는 분명한 상하관계가 있고 극단적인 경우 개개의 학생들이 그룹을 넘어 교류하는 것조차 없을 정도이다.[각주:6] 이러한 학생들 사이의 서열 제도를 가리켜 '스쿨 카스트' 라고 한다. 당연히 유래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이다. 초등학생 때는 이러한 '신분차' 는 그렇에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춘기를 맞는 중학교 이후에는 이러한 계층화가 급속도로 진행된다.

이때 소위 '같은 신분' 인 그룹 안에서 역할로서의 캐릭터가 나누어지는 것이다. 캐릭터 배분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고,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캐릭터는 본인이 스스로 인정하는 성격의 방향과는 미묘하게 다른 경우도 있지만 한번 정해진 캐릭터는 거의 변경되지 않는다. 캐릭터로부터 일탈하거나 하는 행동을 하면 그걸 이유로 무시하거나 열외시키는 등의 따돌림으로 발전할 경우조차 있다. 즉 실질적으로 그들에게 캐릭터란 거의 강제되는 것이다.

스쿨 카스트의 구성은 대개 다음과 같은 식이다. 카스트 상위(1군, 혹은 A랭크)를 점하는 학생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데, 축구나 야구 등 발군의 운동신경(단 아무 운동이나 해당하는 건 아닌 듯하다)을 갖고 있고, 사교적이고 친구가 많고 모임의 분위기를 지배하며 유머 센스가 있고, 몸매나 옷차림을 포함한 용모가 뛰어나고, 이성 관계가 윤택하고 성 경험도 있다. 따라서 카스트 하위의 학생을 괴롭혀 웃음거리로 만들거나 싫은 일을 강요할 힘이 있다.

카스트 하위(3군, C랭크)는 이와는 정반대로 생각하면 된다. 운동치이거나 문화계[각주:7]이고 외모가 두드러지지 않고 이성 관계도 빈약하고 특히 오타쿠스런 취미가 있을 경우 카스트 최하위 확정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참고로 지식이 풍부하다든지 공부를 잘하는 것은 요즘은 인망과는 전혀 관계없는 능력으로 치부되는 듯 하다.[각주:8]

2군 또는 B랭크는 상위층과 하위층의 중간 계급으로 대다수 학생들은 여기 속한다.

이러한 계층은 유동성이 적고 일단 카스트가 결정되어 버리면 적어도 일년 - 즉 반이 또 바뀔 때까지 - 은 안착하게 된다. 모리구치 아키라[각주:9]이러한 카스트 분위를 정하는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이들은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나 반 배정을 받았을 때 각 사람의 의사소통 능력, 운동 능력, 용모 등을 재며 첫 한두달 동안 학급에서 자신의 위치를 탐색합니다. 이때 상위 계급을 차지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일년간 '왕따' 를 당할 위험에서 벗어납니다.  거꾸로 하위 계급밖에 차지할 수 없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고위험군으로서 일년을 보내야 합니다. [각주:10]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이 '커뮤니케이션 편중주의' 이다. 좀 더 모리구치 아키라를 인용하자면 

"스쿨 카스트를 결정하는 최대 요인은 '커뮤니케이션 능력' 이라 생각합니다. (단 고등학교의 경우 학교의 레벨에 따라 학력이나 싸움 능력도 큰 요인으로 작용한다)"[각주:11]

그렇다. 이제 아이들의 대인 평가는 거의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능숙함 여부만으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명백한 이상異常 상태이다. 내가 중학생이던 삼십 년쯤 전의 교실은 요즘 교사라면 틀림없이 ’선택성 함묵증'[각주:12]이나 '광범성 발달장애[각주:13]' 란 진단을 내렸을 게 틀림없을 정도로 말이 없는 학생이 두세 명은 있었다. 확실히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낮았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말이 없어도 구기 운동을 잘한다든지 그림을 잘 그린다든지 하는 점을 평가받아 다른 학생들이 괄목하고 관심을 가졌다. '옛날이 좋았어' 같은 안이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학생들 사이의 대인 평가의 기준은 그때가 훨씬 다양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커뮤니케이션 외의 재능은 괄목의 여지가 거의 없다.

한때 아이들의 준거 사회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갖던 '공부' '그림' '글솜씨' 같은 재능은 이젠 대인 평가의 축으로는 기능을 상실했다. 심지어는 상황에 따라 그런 재능을 발휘하여 캐릭터에서 일탈했다는 이유로 카스트 분위가 추락하는 사태도 발생할 수 있다.


'자기탐색' 유형自分探し系, 캐릭터의 기원으로 보자면


젊은이들의 커뮤니케이션 양상이 변해간다는 것을 내가 실감한 건 십 년 정도 전에 쓴 어떤 원고가 그 계기였다. 모 잡지의 기획으로 시부야와 하라주쿠에서 표본 조사를 위해 몇 사람의 젊은이들과 인터뷰를 하고, 그들에게서 어떠한 '부족 집단' 적 차이가 있는지의 여부를 검토해 보려 할 때였다.[각주:14]취재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간단히 말해 시부야 유형의 젊은이들은 유난히 친구가 많고 사교성이 높았으며 하라주쿠 유형은 대인관계가 그렇게 넓지는 않으나 자신의 목표를 확실히 가졌다는 것의 차이가 분명히 나타났다. 표본 사례의 수가 각각 세 명씩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것을 현장 조사의 성과라 칭하며 일반화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 인터뷰 경험은 젊은이들을 고찰할 때의 하나의 구조적인 시점을 형성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현대의 젊은이들은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기준으로 대략 두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 '자기탐색' 유형과 '은둔형 외톨이ひきこもり' 유형으로 말이다.

미리 말해두자면 어디까지나 두 유형은 가역적이다. 고정적인 성격의 분류와는 다르다. 동일한 개인이 장소에 따라 '자기탐색' 유형처럼 굴거나 '은둔형 외톨이' 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당장 나부터 명실상부한 '은둔형 외톨이' 유형임을 스스로 인정하지만 어울리는 상대나 상황에 따라 '자기탐색' 유형처럼 굴고 마는 경우도 있다.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자기 이미지의 안정성은 많은 부분에서 반비례의 관계에 놓여 있다. 이런 경향은 특히 사춘기·청년기에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쉽다. 예를 들어 은둔형 외톨이 유형의 젊은이는 일반적으로 의사 소통에 소극적이거나 서툰 대신 비교적 안정된 자기 이미지를 갖고 있다. 반면 자기탐색 유형의 젊은이는 높은 사교성을 보유한 대신 자기 이미지가 불안정해지기 쉽다.

따라서 각각 사회 적응 단계에서 좌절하고 낙오되어 갈 때의 방향성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은둔형 외톨이 유형은 글자 그대로 방 안에 틀어박히거나 노숙자가 될 위험이 있다. 이것은 의사 소통의 단절을 한층 철저히 하는 방향이다. 반면 자기탐색 유형은 종교나 주술에 심취하거나 자해 행위로 발전할 염려가 있다. 이쪽은 반대로 의사소통이나 인간관계에 대한 의존이 폭주를 일으켰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캐릭터란 자기탐색 유형을 위해 있는 말이다. 자기 이미지가 정착되지 않았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별개의 소통 공간에서 그때그때 장소와 상황의 분위기를 따라 캐릭터를 만들어내거나 또는 살짝 조정하는 재능은 자기탐색 유형만의 장점이란 것이다. 즉 '가면을 잘 쓰기 위한 재능' 이란 말이다. 반면 은둔형 외톨이 유형은 고유한 자아 외의 다른 캐릭터를 만든다든지 하는 방면은 참패를 맛볼 수밖에 없다. 왜냐면 그들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패배의식이 짙고, 오히려 자기 이미지가 확립되었기에 장소와 상황에 따라 캐릭터를 갈아끼우는 건 서투르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 말수가 없는 것이 캐릭터성을 갖는 경우도 있긴 있지만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학교 공간에서 압도적으로 상위를 차지하는 것은 '자기탐색 유형' 의 학생들이다. 과잉적으로 사교성이 높은데다 쉽게 동질 집단을 형성하고 학급의 중심이 되어 지배적인 권력을 휘두른다. 반면 '은둔형 외톨이' 유형은 동질 집단의 응집력이 약하고 각자 고립되기 쉬워서 학급 내에서도 아웃사이더로 겉도는 존재가 되기 쉽다. 결국 스쿨 카스트 내에서 그들의 존재는 무시당하거나 교실 내 담화의 소재로 굴려지는 정도의 가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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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번역문에 대한 모든 권리는 출판원 ちくま文庫와 저자 斉藤環에게 있습니다.


  1. 역자 주. 山陰地方, 츄고쿠 지방에서 동해에 접한 지역으로 보통 톳토리 현, 시마네 현을 일컫는다 [본문으로]
  2. 역자 주. 천연天然이란 캐릭터 특성 중 하나로 '순진하고 세상의 때가 덜 타 천진난만하고 낙천적인 모습을 보이는 성향' 을 일컫는다. [본문으로]
  3. 역자 주. 따돌림을 당한다는 게 아니다. 서문에서 언급한 만담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는 일본은 준거 공동체에서도 '기가 세고 딴죽을 거는 역할' 과 '기가 약하고 딴죽을 받아주는 역할' 의 구분이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본문으로]
  4. 역자 주. 이바쇼居場所。직역하면 '있을 곳'.근대화 이후 사회경제구조의 개편과 함께 빠르게 개인주의가 스며들며 형성된 일본인의 정서 코드. 단어를 좀더 구체적으로 풀자면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 안식할 수 있는 곳' [본문으로]
  5. 역자 주. 원문 : 棲み分け。영어로는 habitat isolation. 생활양식이 유사한 복수의 동물 개체 또는 개체군이 터전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나누어 차지한 채 생존하는 현상. [본문으로]
  6. 도이 타카요시土井隆義 「캐릭터화하는 / 캐릭터화되는 아이들キャラ化する / される子どもたち 」이와나미 북클릿岩波ブックレット에서 발췌 [본문으로]
  7. 역자 주. 일본 공교육 하의 학생들의 방과후 활동部活動은 크게 체육계, 문화계(연극, 서예, 다도 등 정靜적 활동), 귀가부(부활동을 안함)로 나뉜다 [본문으로]
  8. 역자 주. 우리나라에 공부벌레란 말이 있듯 일본에도 공부에만 매달리는 학생을 두고 주로 다른 학생들이 비꼬는 말로 카리벤カリ勉이있다. [본문으로]
  9. 역자 주. 森口 朗(もりぐち あきら、1960年6月1日 - ). 일본의 교육평론가 [본문으로]
  10. 모리구치 아키라 「따돌림의 구조」(신쵸신서新潮新書)에서 발췌 [본문으로]
  11. 모리구치 아키라 「따돌림의 구조」(신쵸신서新潮新書)에서 발췌 [본문으로]
  12. 역자 주. 場面緘黙症, Selective Mutism. 가정 등에서는 문제없이 말하지만 사회적 불안증으로 학교, 유치원 등특정 공간에서 발화를 못하는 증상. [본문으로]
  13. pervasive developmental disorders, PDD. 사회성, 커뮤니케이션 기능 등의 발달 지체가 특징인 다섯 가지 정신 및 행동장애군의 총칭. [본문으로]
  14. 사이토 타마키 『젊은이의 모든 것若者の全て』,PHPエディターズグループ 수록 [본문으로]

1장 세 악마 ~루터가 말하는 악마, 밀턴이 말하는 악마, 괴테가 말하는 악마~ (1)

루터, 밀턴, 괴테. 한데 엮기엔 매우 이질적인 이름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세 위인을 각자 '악의 원칙' 을 제창한 대표자이며 또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악을 규정지은 사람으로서 연결짓는다면 흥미가 번뜩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 사람은 각자 악의 개념을 두고 가장 저주스러운 존재로, 사람의 일에 끊임없이 작용하는 자로, 악한 속성의 것을 만들어내는 기능을 하는 자로 기록에 남겼다. 루터만큼 놀라울 정도로 인류 최악의 공적公敵으로서의 악의 존재에 대해 그 진심이 와닿는 사람도 없다. 특히 루터의 시대에는 그의 행보를 방해한 악을 그 스스로 가능하다면 "주의 은총으로부터 떼어내고 싶다' 고 여겼을 정도이다. 악에 대한 루터의 정확한 개념은 그의 삶과 저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밀턴이 말하는 사탄과 마지막으로 괴테가 말하는 메피스토펠레스가 있다. 세 개념을 뒤섞거나 그때그때 서로 혼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 위대한 원칙을 같은 것으로 놓고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그 특이성과 차이점을 연구 과제로 놓기엔 적절하지 않은 걸까? 실은 밀턴의 사탄과 괴테의 메피스토펠레스는 애매한 안티테제로서 빈번하게 대조되어 왔다. 그리고 어느 저자도 괴테의 메피스토펠레스를 기술하며 밀턴의 사탄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둘의 차이에 대한 논문은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린 그러한 담론에 더 위대하고 수용성 높은 지론 - 즉 밀턴의 사탄과 괴테의 메피스토펠레스에 대한 담론에 루터의 악마에 대한 지론을 거드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이론적 논의는 그다지 전제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목적은 세 악의 원칙의 매우 뚜렷한 윤곽을 찾아 비교하는 것이 전부이다. 경험에 기반한 하나와 시로 쓰인 둘을 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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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마지막 문장은 발제 단계부터 루터의 악의 원칙에 대한 개념과 밀턴과 괴테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을 인지한 채 전개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저 셋은 모두 악을 창출하는 기능을 하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성서에 입각한 관점에서 그 근간을 두고 있다. 루터는 성서의 사소한 문장과 부호까지 굳게 신봉하는 사람으로서 악마에 대한 서술 역시 신봉했다. 그에 따라 자기 자신과 외부에서의 악의 경험을 악마에 대한 검증의 형태로서 쏟아부었다. 그가 그런 예비적인 구상이 없이 시작했다면 자신의 경험을 그 외의 방식 - 그렇게 효과적이지도, 루터답지도 않은 - 으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에 부딫혔을 것이다. 밀턴 역시 성서에서 실낙원의 사탄의 구상 요소들을 차용했다. 실낙원의 주인공은 성서의 타천사이다. 그리고 이 시의 가장 인상적인 점 중 하나는 작중에서 순수한 신학적 서술로 빛나는 작가의 위대한 상상력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괴테의 메피스토펠레스가 밀턴의 사탄이나 루터의 악마에 비해 성서의 정신이 발현되지 않았단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메피스토펠레스에서조차 똑같은 전승적 존재의 윤곽을 인식한다. 그렇기에 이 셋은 모두 공통점이 있는데 첫째, 악을 창출하는 저주스러운 실체의 존재에 대한 성서의 관점에 기초한 것이며 둘째, 많게든 적게든 그에 대한 성서의 근거를 차용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했듯 루터의 악마와 밀턴, 괴테의 악마는 각각 다른 범주에 속한다. 루터의 악마는 자전적, 전기적 현상이고 밀턴의 사탄, 괴테의 메피스토펠레스는 문학적 발현이다. 루터는 개인의 경험을 예시로 성서의 악한 존재를 설명하였다. 그가 맞닥뜨린 방해가 무엇이든, 자신의 마음이나 외부 환경에서 찾은 성령의 은총의 장애물이 무엇이든, 복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똑똑히 본 무슨 일이든, 교단에서 부정하거나 서운한 영혼의 체험이 발생하는 어떤 사태이든, 자연에서 발생한 어떤 악질적인 기현상이든, 그는 그로부터 악마에 대한 더 선명한 이해를 얻었다. 이렇게 보면 루터는 자신의 전 생애를 악마의 형상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는 데 바쳤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반면 밀턴의 사탄과 괴테의 메피스토펠레스는 시적 창조물이다. 하나는 서사시이고 또 하나는 희곡이다. 밀턴은 성서에서 구상 요소들을 차용하며 타락한 대천사를 묘사하는 데 열을 올렸는데 , 그가 천지창조의 시대부터 존재했다고 가정하며, 여전히 전능자와 싸우고 있거나 거대한 복수를 획책하며 별들을 돌아다니고 있다든지 하는 역할을 심혈을 기울여 정했다. 괴테는 악령이 6천 년 동안 존재해 왔으며 더이상 이동력이나 우주에 대한 간섭력이 예전같지 않으나, 익히 알려진 그의 역할을 번잡한 도시와 개개인의 마음에 발휘한다는 묘사에 힘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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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번역에 대한 권리는 David Masson과 University of Edinburgh, MACMILLAN AND CO. 에 있습니다.

기타 2017. 8. 7. 17:17

Diener des Bösen (악의 하인 독일어 번안곡)

 

오 나의 공주님, 악에 시달리는 그대여

우린 같은 쌍둥이, 둘이 합쳐 하나죠

그리고 때가 이르면 나는 당신의 하인이니

 당신을 따라 악마에게 나를 바치겠어요

 

 우리의 운명은 이미 모든 여정에서

 똑같은 교회 종소리의 축복을 받았죠

 우리 부모님은 전쟁과 이 나라에서 더 이상 자유롭지 못했고

 얼마 안가 그들은 우리의 미래를 둘로 나누었죠

 

온 세상이 당신을 적대한다 해도

 당신의 뒤를 지킬게요 떠나지 않을게요

 그러니 날 보고 웃어줘요 다른 건 다 잊고

 당신을 웃게 해 줄 하나뿐인 남동생이니까요

 

 오 나의 공주님, 나는 당신의 하인

 희망으로 가득 찬 우린 쌍둥이 남매

 그리고 때가 이르면 나는 당신의 수호자이니

 당신을 따라 악마에게 나를 바치겠어요

 

 어느 날 이웃 나라를 방문했을 때

 녹색 옷을 두른 여자아이를 보았어요

 밝게 웃으며 다정하게 말을 걸어 주었지요

 아무 말도 못한 채 나는 사랑에 빠졌어요

 

 그러나 공주님은 그 아이가 죽기를 바랐죠

 그 뜻에 따를게요 나에겐 상관없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난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어요

 어째서 쓰라린 눈물은 그치지 않는 걸까요?”

 

 오 나의 공주님, 나는 당신의 하인

 희망으로 가득 찬 우린 쌍둥이 남매

 오늘의 다과는 브리오슈에요. 이런, 천천히 들어요.”

 천진하고 티 없는 미소로 나를 보는 당신

 

 곧 사람들이 우릴 처형하려고 몰려들 거예요

 걱정 말아요, 설령 우리가 죄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들이 당신을 죽이게 두지 않을 거예요

 내 뒤에 바짝 숨어요, 모두와 맞서 싸울게요

 

 내 옷을 입어. 저들을 속여 볼게.”

 뒤돌아보지 말고 도망가.”

 내가 공주로 변장할게. 서둘러야 해.”

 우린 쌍둥이니까 사람들이 구별 못 할 거야.”

 

 나는 공주가 되어요, 당신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

 머리카락까지 똑같은 우리는 쌍둥이 남매

 세상이 당신을 악마라 한다면

 나의 죽음으로 충분해요 당신의 피는 나에게도 흐르니까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옛날

 간악한 사람들로 가득한 왕국에

 홀로 나라를 다스리던 공주가 있었어요

 그녀는 나의 누나예요, 단지 그뿐이에요

 

 시간이 흐르고 있어요 그녀가 견뎌냈으면 해요

 종이 울리고 이젠 너무 늦었어요

 주위를 신경 쓰지 않고 당신이 큰 소리로 나를 불러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속삭여 준 그 말을 돌려주네요.

 

 옛날에 공주와 하인이 있었습니다

 둘은 헤어졌던 쌍둥이 남매였습니다

 종이 울리고, 이윽고 공주는 울었습니다

 

 사람들은 알아요, 그녀가 다시 자신의 반쪽과 하나가 되고 싶었던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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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곡의 한국어 번역에 대한 모든 권리는 JoyDreamer에게 있으며 별도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