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캐러화하는 젊은이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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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러는 어떠한 기능을 가지는가

 

, 이러한 현실이 있다고 해서 캐러 문화야말로 왕따의 온상이다라 결론짓는 건 너무 순진한 처사다. 애초에 어떤 이점도 없는 문화가 이정도로 넓게 수용되리라 생각하기 힘들다. 캐러 문화의 이점에 대해서는 추후 논하겠지만, 우선은 결점을 검토해 보도록 하자. 역시 그 중 가장 큰 결점은 캐러 문화가 왕따 관계로 이어지기 쉬운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토 아사오는 왕따의 사회 이론’(카시와쇼보柏書房에서 왕따가 발생하는 메카니즘을 중간 집단 전체주의라 명명한다. 이 중간 집단 전체주의는 여러 동조 압력의 온상이며 왕따 역시 그에서 생겨난다.

캐러의 분담을 결정짓는 것 역시 이러한 교실이나 친밀한 집단이란 이름의 중간 집단 내부의 역학이다. ‘노부타를 프로듀스리는 메보다 100배 무섭다에서 그려진 건 이러한 집단 역동 법칙을 역이용하여 통제 하에 두려는 시도이다. 많은 중간집단에서 이런 캐러 분담의 역학이 작동하고 있다. 이 역학은 캐러의 다양성보단 정형화를 야기한다. 그 결과 구성원 중 누군가가 정형화된 캐러 중 하나인 왕따 캐러동네북 캐러를 분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캐러의 공존에 기반한 스쿨 카스트에는 교실 공간을 안정시키는 기능이 있다. 문제는 카스트 자체의 안정으로 목적이 전도되어 캐러 분담이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지고 만다는 점이다.

이때 캐러 분담을 야기하는 집단 역학 자체의 내부에 따돌림이 일찌감치 싹튼다. 이런 관점에서 캐러의 분화왕따의 사이에는 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캐러화의 장점에 대해 생각해보자. 가장 큰 장점은 소통의 원활화이다. 상대의 캐러를 알면 의사소통 패턴도 자동으로 정착된다. ‘캐러라는 코드의 편리한 점은 본 성격이 복잡하든 단순하든 캐러라는 틀에 똑같이 대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누마 후미아키에 따르면, 타인의 캐러는 수다스럽게 이야기하는 고등학생에게 본인의 캐러를 물어보니 의외로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캐러론 단 이 대답은 도저히 가늠조차 못하겠다는 의미는 아닐 터이다. 만약 정말로 자신의 캐러를 이해하지 못하면 캐러가 겹치는 것’ ‘캐릭터를 비집고 나오는 것을 지양하는 데 관심을 두는 것도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아마 그들의 잘 모르겠다아이들에게 어떤 캐러로 인식되고 있는지는 알지만 그게 내 성격이라 한들 와 닿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캐러의 자기인식은 이른바 성 정체성 인식과는 별개로 자아친화성이 낮다. 글 서두에 언급한 학생 사례들의 캐러를 연기하기 지쳤다는 현상의 원인도 상기 맥락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캐러는 자발적으로 연기하기보단 아이들의 소통 공간에서 자기인식당하고’, 연기당하는것이라 하겠다. 설령 이게 나 자신이라는 실감이 동반되지 않더라도 일단 캐러의 자기인식이 성립되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해방된다. ‘캐러를 연기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자각은 캐러의 배후에 있(다고 상정되)진정한 자신의 존재를 믿게 하고, 그것을 보호해주기까지 할 것이다.

연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은 캐러가 손상을 입어봤자 고작 거짓된 가면일 뿐이니 진정한 자신과는 상관없다며 딱 잘라 결론지을 수도 있다. 이와 더불어 아무도 인생에서 피해갈 수 없는 어떤 역할을 연기하는행위의 예행연습도 될 수 있다.

또한 서로의 캐러를 재귀적으로 인식하는 행위만으로 친밀한 소통을 영위하는 기분이 들게 해준다는 것이 캐러 개념의 좋은 점이다.

한때 나는 휴대폰 메일서비스를 통한 소통을 정보량이 적다는 의미에서 털끝만하다고 비유한 적 있다. 소통의 양상이 의미 있는 정보를 주고받는 행위에서 상호간 캐러의 윤곽을 확인하는 듯한 선문답으로 변질되어가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렇게 장황해빠진 소통의 정보량은 한없이 0에 수렴한다. 친밀함을 확인하는 데는 새로운 정보의 양이 적은 게 좋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캐러는 모종의 소통 요소가 응집된 유사인격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후술하겠지만, 해리성동일성장애(다중인격장애)의 인격 교대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워질 것이다. 해리성동일성장애 질환자는 (병인지 고의인지는 둘째 치고) 응석부리고 싶을 땐 유아교대 인격을, 공격성을 발휘하고 싶을 때는 난폭한 사람의 교대 인격을 드러낸다. 각각의 교대 인격은 틀에 박히고 깊이가 없는데다 성찰 능력도 불충분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교대 인격은 본래 인격에 준하는 가상의 존재라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러한 속성은 캐러에도 전부 들어맞는다.

상기 내용에서 미루어 나는 오늘날의 교실 공간이 일종의 다중인격 공간으로 구성된 게 아닌가 하는 가설을 제시하는 바이다. 캐러의 중복이나 이탈이 용납되지 않는 건 그 생태계가 만들어낸 미묘한 균형이 깨져 혼란에 빠지는 것을 막으려는 의지가 아닐까.

 

캐러의 재귀성은 무엇을 야기하는가

 

방금 지적한 캐러의 재귀성은 캐러라는 개념의 본질과 관련되었을 뿐 아니라, 일종의 피드백 회로를 통해 젊은이들의 정신 그 자체에 깊이 영향을 끼치는 듯하다. 그러한 면이 가장 현저하게 나타난 사례가 최근 수년간 연이어 발생한 묻지마 살인 사건이다. 특히 2008년은 묻지마 살인 사건이 연이어 일어난 해로 기억한다. 그해 3월에는 츠치우라 시와 오카야마 시에서, 6월에는 아키하바라에서, 7월에는 하치오지 시에서 똑같은 범죄가 되풀이되었기 때문이다.

사건의 용의자를 옹호하려는 의도는 털끝만큼도 없다. 하지만 그 배경에 자리한 요소들의 검토를 통해 ‘00년대마음을 보게 된다. 당시 아키하바라 사건에 대한 인식은 ‘‘파견 근무로 대표되는 젊은이들의 불안정한 근무 형태에 문제가 있다였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파견노동 제도의 재검토가 이어졌다는 점을 봐도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다른 이야기지만 당사자의 목소리보다 사건 하나를 계기로 정책에 손을 대는 정부의 구태의연함은 질려버릴 지경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적 배경만으로는 그들의 어긋난 자기애는 이해할 수 없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그들은 일종의 패배자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패배의 각인이 그들의 운명이며 노력이나 기회로는 바뀔리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듯 보였다. 자칫 자기혐오로 비칠 정도의 부정적인 의식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정도로 확신하는 모습을 볼 때 자기부정적 자기애라 함이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엇나간 자의식을 단순히 격차사회나 신자유주의의 산물로 간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이러한 의식의 배경에 있는 건 방금 전까지 지적한 소통 편중주의캐러 문화가 아닐까.

무슨 말인가 하니 다음과 같다. 묻지마 살인 사건의 용의자들의 공통점은 비행 경험이나 불량 써클에 소속된 경험이 없으며’, 따라서 오히려 학교나 사회에서 소통 약자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에는 빈곤이나 장애 이상으로 소통 능력의 부재를 불행한 것으로 취급한다. 다시 말해 개인의 불행의 양상은 다양하지만 그 원인이 곧잘 소통의 문제로 비약된다는 뜻이다.

가령 아키하바라 사건의 용의자 카토는 자신의 인터넷 게시판에 못생겼으면 연애할 권리가 없다는 문장을 빈번하게 써 왔다. ‘못생겼다’, ‘인기가 없다는 말에는 결정적으로 자신이 소통 약자이며 그건 어쩔 도리가 없다는 체념마저 담겨 있다.

 

(참고로 카토는 2010년에 시작한 공판에서 게시판에서는 인기 없는캐릭터를 연기했다” “사실은 친구도 많았다는 등 매스컴을 통해 비친 이미지와는 상이한 증언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일련의 증언에서 나는 강한 편향성을 느꼈다. 자신의 범행 동기에 사회적 배경이 반영되었다는 것을 되도록 회피하려는 듯 보였다는 말이다. 자신의 죄를 자각하면서도 그 원인을 양육 환경이나 사회적 억압에서 찾는 것만은 하지 않으려는 강한 결의가 그에게 있는 게 아닐까.)

 

익명성과 캐러

 

일련의 묻지마 살인 사건의 또 다른 공통적인 특징은 익명성이다. 어느 경우든 용의자들은 도장으로 찍어낸 듯 똑같이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고 말했다. 마치 인터넷에서 천편일률적인 양식의 문구(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줬다. 상대는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반성하고 있다.)를 읊듯 말이다. 살인의 동기조차 어딘가에서 빌려서 말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한때 젊은이들의 흉악 범죄는 90년대의 사카키바라酒鬼薔薇 사건[각주:1]처럼 용의자의 자기표현과 더불어 존재를 증명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당시의 특이한 범행성명문에서도 그를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련의 묻지마 살인 사건에는 그러한 표현 충동조차 한없이 희박하다. 나는 누구라도 상관없었다는 말이 도무지 피해자만을 지칭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누구라도 상관없던건 오히려 그들 자신이 아니었을까. 그렇다. 적어도 내게는 “(이런 짓을 하는 건)내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상관없었다는 중얼거림이 확실하게 들렸다.

일종의 자폭 테러의 성향을 띤다는 게 그들이 저지른 범행의 공통점이다. 그들은 상당히 치밀한 범행 계획을 세웠으면서도 범행 후 도주 경로는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 마치 진작 체포되어 극형에 처해질 것을 바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포자기식이었다. 거기다가 그 정도의 위험을 무릅쓰는 와중에 그들은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며 절망하고 있지 않았는가.

지금 시대에는 범죄란 작금의 불완전한 사회 시스템이 일정 확률로 내포하는 위험 내지 버그로서 발생하며 그때마다 법과 제도에 의거하여 엄숙히 처리(디버그)된다. 그들 역시 그러한 버그들 중 하나에 불과하며, 운명이나 필연성과는 관계없는 순수한 확률의 문제이다. 확률의 문제인 이상 그들은 얼마든지 교체될 수 있는 존재, 익명의 존재를 면할 수 없다.

자신이 확률에 의거해 치부를 당한 익명의 존재라는 자의식. 이건 꼭 패배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윗세대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쨌든 한 발짝 내딛어 보자, “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지 않느냐. 젊은이들을 대신해서 내가 대답하자면,

그야말로 정론이고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말씀조차 예상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해보면 잘 풀릴지도 모른다. 방법의 힌트도 길가의 차이는 돌멩이만큼 인터넷에 얼마든지 굴러다니고 있다. 남은 건 할 의욕뿐이다.‘ 우리들 역시 몇 백 번을 스스로에게 되뇌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인지하고 말았다. 이기는 것도 지는 것도 결국 확률의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러면 이길 확률에 걸어 보라? 뭘 모르신다. 만사가 확률의 문제인 이상 이기든 지든 영원히 안심할 순 없다고? 아무리 성공한들 나는 익명인 채 의연하게 확률의 문제로 치부될 테니까.”

 

사람에게는 아마도 행복의 재능이라는 게 있다. 우연히 성공한 체험을 두고 이것은 필연적인 운명이었다고 자신에게 납득시키는 재능의 이야기다. 필연성을 향한 그러한 신앙은 자신을 교체할 수 없는 고유한 존재라 간주할 확신을 기반으로 한다. 그것을 신앙이라 한 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거기에는 아무 근거가 없다.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그 신앙을 버리고 있다.

필연성이나 고유성의 이름으로 익명성을 회피할 수 없다면, 이제 도망칠 길은 없는 걸까. 이 시점에서 요청되는 게 캐러이다. 사실 자신을 교체할 수 없다는 고유성은 추궁해보면 딱히 근거는 없다. 기술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가령 정신분석에서는 그렇게 근거 없는점이야말로 인간 주체를 지탱한다고 본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부정신학否定神學이다. 추후 언급할 이토 고[각주:2]의 지적으로 유명해진 캐릭터キャラクター와 캐러キャラ의 구별에 관해 말하자면 캐릭터는 이러한 고유성을 어딘가에 내재하고 있다. 그러나 캐러에는 문자 그대로의 고유성은 빈약하다. 라캉의 정신분석을 부정신학으로써 비판한 아즈마 히로키가 확률론에서 캐릭터의 이론화로 나아간 것은 필연적인 흐름이다.

그러나 이 확률적인 세계에서는 그러한 고유성을 믿는 건 불가능하다. 모든 것이 우연이라는 신앙은 이 하나뿐인 세계의 단 하나뿐인 자신이라는 필연성을 향한 신앙을 토대부터 헤집어버린다. 그렇다. 요컨대 이 두 개의 신앙은 칸트 이래 우연과 필연의 안티노미의 문제로 귀결한다. 즉 어느 쪽에도 근거는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어쩌다 현대에 와서 제반 사정에 따라 모든 것은 우연의 세력이 우세가 되었을 뿐이다. ‘모든 것은 우연교의 세계관에 따라 개인은 교체 가능한 존재로 익명화됨과 동시에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세계의 복수複數이다. 같은 말이지만 세계의 다중多重라 해도 무방하다. 이 두 가지 변화는 표리일체의 관계이다. 개인의 익명화가 세계의 복수화를 요청하고 세계의 복수화는 개인의 익명화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여러분은 커다란 성공 체험을 겪은 순간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은 없으신가. ‘이야, 이번에는 어쩌다가 잘 풀렸어. 하지만 다음 생에도 똑같이 성공할 수 있을까하고 말이다. 고백하자면 실은 나는 자주 그런 감정이 밀어닥친다. 그렇다. 바로 이 순간이다. ‘나의 세계가 복수화되고 가 익명화되는 순간. 만약 마음속으로 인생은 한 번뿐이라 믿고 있다면 성공 체험을 오롯이 맛보며 내일부터의 자신에게 이어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서론이 길어졌다만 이 모든 것은 우연교와 캐러는 꽤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익명으로 치부된 개인의 마음에 고유성과는 별개의 방식으로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것이 캐러이다. 기술할 수 없는 고유성과는 달리 캐러는 기술할 수 있다. 오히려 캐러야말로 늘 기술되지 않으면 존속할 수 없는 존재이다.

또한,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캐러의 또 하나의 특징은 복수의 세계 어디에 있어도 그 캐러의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여기서 곧장 도라에몽의 타임슬립물을 떠올린 당신은 제대로 짚었다). 방금 전 밝힌 나의 개인적 감상에 근거하여 말하자면 다음 생에도캐러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는 중에 캐러를 유지시켜주는 것이 바로 소통의 힘이다. ‘대신할 수 없는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자신에 상응하는 신앙을 잃은 개인이 마음의 안정을 캐러에 의탁하려 하면 캐러의 기술記述=상호확인을 가능케 하는 재귀적 소통을 향해 반복해서 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 외의 수단은 없다. 단지 소통만이 자신의 캐러=재귀적 동일성을 유지시켜줄 뿐이다.

그것은 우연성과 익명성이라는 이른바 유동성의 극한까지 자신을 노출시키며 간신히 자의식의 동일성과 연속성을 이어붙이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그런 의미에서 캐러의 획득은 임시대피소로서 순간의 안심을 부여하긴 한다. 그러나 그 대가도 결코 작은 것은 아니다.

대가란 무엇인가, 우선 첫째로, 캐러화는 성장과 성숙을 저해한다. 어떤 캐러든 그 기술이 늘 소통에 동반하는 이상 캐러로부터의 이탈은 대부분 본능적으로기피된다. 그래서 한번 캐러가 확정되어버리면 거기서 하차하는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언젠가 완벽한 소통은 성장을 저해한다고 쓴 적이 있다.(문학의 단층, 아사히신문 출판) 완벽한, 즉 오해나 잡음이 섞이지 않은 소통은 완벽한 상호이해를 야기함과 동시에 그렇게 이해되고 만 자신’=캐러의 강한 고착 역시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고착이야말로 개인의 변화와 성장을 가로막는 원흉이다.

아까 언급한 자기부정의 자기애 역시 아마도 여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모종의 소통을 통해 부정적인 자기 이미지(음지 캐러, 인기 없는 캐러 등)에 고착된 개인은 부정적인 자기 이미지의 현실성(당위성)을 재확인하는 것으로밖에 자기애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변으로부터 부정적인 캐러로 상정되었음에도 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연기하는 듯 보이는 개인이 적지 않은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의도치 않은 캐러를 맡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런 캐러라도 한번 잃어버리면 거창한 표현으로 이 세계에 자신이 있을 곳은 없어진다. 그것은 원치 않는 캐러를 굳이 맡는 것보다 아득히 두려운 사태이다.

이때 자해나 자기부정을 비롯한 자기 자신과의 소통 역시 마치 캐러를 확인하는 재귀성을 야기한다. 카토가 작성한 자문자답의 행태를 떠올려보자. 정신과의사로서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일단 이러한 자해적인 캐러 설정이 성립되고 나서는 긍정적인 자기애를 살려 회복시킬 수 있을지 확고한 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문제는 안전이나 자유의 적당한 충족과 맞바꾸어, 끊임없이 사람들이 익명화를 향하는 것 말곤 선택의 여지가 없는 현대 추세에 저항하도록 굳이 고유성을 옹호하는 지극히 어려운 문제임이 틀림없다. 다르게 말하면 사회공학적 의 추세(자연과학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다)에 대응하여 얼마나 인문적 의 입지를 확보해야 하는지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그렇다고 하면 눈앞의 상황은 절망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해 적어도 이론적으로 명쾌한 답은 보이지 않는다. 자기애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재귀적 소통을 통해 유지되는 자기동일성이라는 사실이 이미 성립되었다면 그 자체를 두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는 어렵다.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급의 이점도 상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여기서 내가 언급해 둔 자기동일성이라는 말을 주의했으면 한다. 사람들 입에 수없이 오르내리는 이 개념은 전적으로 명백하지 않다. ‘자신이 곧 자신이라는 개념의 근거는 놀라우리만큼 덧없다.’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해체하기 쉬운 존재인지 하는 임상적 사실로부터도 접근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는 그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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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번역문에 대한 모든 권리는 출판원 ちくま文庫와 저자 斉藤環에게 있습니다

  1. 정식 명칭은 고베 아동 연속 살상 사건神戸児童連続殺傷事件. 1997년에 아즈마 신이치로가 저지른 살인 사건이다. 범인이 쓴 쪽지에 적힌 사카키바라 세이토酒鬼薔薇聖斗라는 이름에서 따와 사카키바라 사건으로도 불린다. [본문으로]
  2. 伊藤剛(1967~). 만화비평가. 주요 저서로는 『데즈카는 죽었다テヅカ・イズ・デッド』가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