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 일본어/기타 2018. 7. 4. 21:16

인간이야말로 최강의 인터페이스이다


ー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저번 강연회와 로봇 연극, 재밌게 잘 봤습니다. 그리고 ‘일본 과학 미래관’에서 발표하신 안드로이드의 시연도 관람했습니다만, 마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대답하는 게 매우 경이로웠습니다. ‘안드로이드도 여기까지 이르렀나・・・’ 싶었습니다. 소박한 의문입니다만, 애초에 어째서 우리들은 인간형 로봇에 흥미를 가지게 된 걸까요?

이시구로 사토시(이하 이시구로) “‘사람은 사람을 인식하는 기능이 있다’ 는걸 아는 것이 일단 중요합니다. 아니, ‘사람의 형태를 한 대상이 더 인식하기 쉽다’ 고 해야겠군요. 오늘날의 스마트폰이나 휴대폰은 인간에게 이상적인 인터페이스가 아닙니다. 가장 이상적인 인터페이스는 인간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기술이 발전할수록 세상의 여러 가지 사물들이 인간처럼 변모한 겁니다. 그리고 그 ‘인간다워짐’ 의 절정에 다다른 것이 안드로이드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인터페이스는 인간 그 자체입니다.」 이 발언에 의문을 느끼는 사람도 많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실제로 현재 우리 생활에 관여하는 공업용 로봇이나 휴대전화는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시구로 씨의 발언에서 설득력을 느꼈습니다. 사실은 이 발언을 뒷받침하는 ‘페그 인 홀peg-in-hole’ 실험이라는 게 있습니다. 인간이 봉을 구멍에 넣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였을 때와 똑같은 시퀀스를 기계가 하는 것을 보였을 때를 비교한 실험으로, 인간이 할 때는 아이들은 흉내 내지만 기계의 경우 흉내 내지 않는다는 귀결입니다. 즉 아이들은 흉내 내는 대상에 ‘인간다움’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시구로 씨는 강연회에서도 인간형 쿠션 ‘허그비’ 나 인간형 휴대전화단말 ‘엘포이드’를 소개하며 “인간이 가장 인식하기 쉬운 인터페이스는 사람이다” 라 역설하였습니다. 그에게는 모든 사물들이 인간화되는 것이 필연적인 미래일까요?

우미네코자와 메론, <내일은 기계가 사람이 된다> 中

번역 - 영어/기타 2018. 5. 22. 21:39

독일 철학은 비범한 지성의 결과이다

종교와 철학 체계를 그들의 드문 강점인 합리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독일 철학의 관례이다. 다만 그 몰인정한 기준의 적용은 부당하다. 그들 자신이 사실이길 열망하며 그 신념을 유지하고, 대립하는 다른 견해 – 그것이 얼마나 명백하고 불가피하든 –를 이해利害에 따라 사실이라 하길 금하는 기준의 이야기다. 그러나 종교와 철학 체계가 사멸하거나, 사람들이 (시간의 경과나 주입된 학습에 따라) 종교와 철학 체계의 진리에 대한 질문이 우리의 삶의 문제와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되어 그 영향력에서 이탈할 때에도, 그것들은 관심을 전부 잃지는 않는다. 그리고 처음으로 ‘불신자’ 에게 자신들의 미덕을 명시한다. 그는 그것을 인류 지성의 표현으로 인식한다. 물질세계에 대해서는 잘못 말하고 있을지언정 – 마치 예술이 으레 그렇듯 – 그들이 두른 관점과 정신은 진실하다고 받아들인다. 세상의 그 어느 것도 – 진리마저도 – 인류 지성보다 흥미로울 수는 없는 만큼, 이 터무니없는, 혹은 구식의 종교와 철학 체계들은 사람들에게 반가운 대상이 된다. 그들의 오류에 내재하던 자극이 희석되며 더 이상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위협이 아니게 되고, 저술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얻게 되었다. 기존의 진리가 고전하던 바로 그 굴절 덕택에 말이다.

독일 철학은 비범한 지성의 결과이다. 무언가에 달아오르는 것은 쉽다. 절대적인 의지와 혼돈 상태에 대한 믿음-심지어는 그 가능성을 둘러싼 맹목적인 논쟁-은 이성을 가진 동물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망 받고 배우고, 근면해지고, 도덕적으로 되고, 크리스천이 되고, 심지어는 피할 수 없는 실재와 관습의 장막을 걷어치우고, 우리 앞의 실존을 점유하길 그치지 않는 모든 관례적인 현상을 무릅쓰고 절대적 의지와 자유를 관통하고, 그것들이 설득력 있게 진정한 현실을 향하게 하는 것, 이것들이 바로 비범한 지성이 한 일이다. 존재 이래 불순물이 낀 원시적인 영혼의 깊이를 격세유전식으로 회복한 놀라운 성취이다. 독일 철학에서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자아ego, 곧 세상에 태어난 이후 온갖 회의로 얽힌 영혼이란, 현대에 다시 백주 대낮에 끊임없이 우리를 따라다니며 그 허깨비와 같은 웅변으로 ‘원시적 자아가 아니라 이 세계가 허깨비다’ 라 설득하려 드는 존재이다.

조지 산타야나, <독일 철학의 자기 본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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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LIPS - tell me a nursery tale  (0) 2016.09.17
번역 - 일본어/기타 2018. 5. 22. 21:37

‘무리 없이 번역할 있는 사람’ 과 ‘좀처럼 번역하기 힘든 사람’

질문자 H : ‘번역가가 어울리는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 는 이야기 말입니다만, 작가의 관점에서 ‘무리 없이 번역할 있는 사람’ 과 ‘좀처럼 번역하기 힘든 사람’ 같은 경우도 있습니까?

무라카미 : 있지요.

질문자 H :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번역하기 힘듭니까? 작품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쉽게 할 수 있겠구나’ ‘힘들겠구나’를 알 수 있습니까?

무라카미 : “이건 내가 번역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소설과 “이건 정말 번역하기 싫다” 고 생각이 드는 소설은 확실히 있군요. 그건 그 소설이 ‘뛰어나다’ ‘뛰어나지 않다’ ‘취향이다’ ‘취향이 아니다’ 같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맡을 수 있다” “맡지 못하겠다” 의 여부가 굉장히 크게 작용하지요. 상성의 문제도 있고요. “이건 훌륭한 소설이지만 나는 정말 번역하기 싫다” 든지 “번역할 수 없다” 의 경우도 많이 있어요.

질문자 H : 평소 좋아하는 작가라면 순탄하게 작업할 수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무라카미 : 일단은 그렇습니다. 단,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가령 시바타(공저자 시바타 모토유키) 선생께서 자주 번역하시는 폴 오스터 말입니다만, 독자로서는 좋아하지만 ‘번역하고 싶은지’ 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 관계로, 특히 저는 작가다보니 ‘번역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게 있는가’ 의 여부가 꽤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존 어빙의 장편 하나를 번역했습니다만, 어빙에게서 ‘배우고 싶다’ 느낀 부분이 꽤 컸지요. 카버(레이몬드 카버)도 그렇고 팀 오브라이언도요. 팔십 년대 미국 작가 중 가장 필력이 좋았던 사람을 꼽는다면 오브라이언, 어빙, 카버라고 생각합니다. 그 세 사람에게서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고, 자양분을 흡수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번역한데엔 그렇게 생각한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시바타 : 실제로 번역하신 뒤 “의외로 배울 점이 없구나” 느낀 작가는 있으십니까. (웃음)

무라카미 : 아직까지는 없어요, 그런 사람은요. 무슨 작품이든 분명 배울 부분은 있지요.

시바타 : 처음 읽었을 때 느낀 감상에서 그렇게 벗어나진 않지요?

무라카미 : 그렇지요. “아... 이런 거 안 하는 게 나았어. 시간과 손끝의 낭비였어.” 라 할 일은 없어요.

무라카미 하루키, 시바타 모토유키 <번역야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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