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의 일요일春の日曜の一日

夫天地者 萬物之逆旅 光陰者 百代之過客(부천지자 만물지역려 광음자 백대지과객) 
대저 천지는 만물이 묵어가는 여관이요 세월은 백대의 나그네

而浮生若夢 爲歡 幾何(이부생약몽 위환 기하)
떠도는 인생 꿈과 같으니 기쁨이 얼마나 되나?

古人 秉燭夜游 良有以事 (고인병촉야유 양유이사) 
옛사람들이 촛불을 잡고 밤에 노닌 것도 실로 까닭이 있었음이라

況 陽春召我以煙景 大塊暇我以文章 (황 양춘소아이연경 대괴가아이문장) 
하물며 화창한 봄날이 아름다운 경치로 나를 부르고 조물주가 나에게 문장을 빌려줬음에랴

이백이 지은 문장에 드러난 봄을 읽다보면 이제 나는 저절로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다. 거기다 오늘은 일요일이고 날씨도 쾌청하다. 곧장 어제 약속한 하야시의 집을 방문했다. 온몸이 봄의 고동으로 들썩이고, 다리는 호기롭게 대지를 밟는다. 고풍스러움 그 자체인 하야시의 집 에 들어서자, 만면에 기쁜 빛을 띤 채 그는 들고 있던 이젤을 단단히 챙겨 밖으로 뛰쳐나왔다. 키가 다른 두 사람이 똑같은 이젤과 똑같은 목탄지를 손에 든 채 하얀 운동화를 신고 제2중학교 부근을 목적지로 하여 출발했다. 가는 길에 어딘가 학교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어 하야시에게 물어보았더니 “*훈맹원ー아니 보육원이겠지.” 라 대답했다. 과연 얼굴이 새까만 이삼십 명의 아이들이 제각각 한 쪽에선 세발자전거를 타고 다른 쪽에선 그네를 타며 놀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얼굴 상태가 원만하지는 않다. 새삼 부모님께 감사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길 한쪽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가로질러 나아가니 나무들 사이로 제2중학교의 교사校舍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사팔눈으로 본들 제2중학교 교사는 기후岐阜중학교 교사보다 훌륭하다. 설비부터 시작해서 모든 게.
제2중학교 교문을 지나면 묘지와 맞닥뜨린다. ‘여기 우리 할머니가 묻혀 있다’ 는 생각을 하고 있자, 갑자기 작년 가을 사카호기坂祝 땅에서 나뭇잎과 함께 쓸쓸히 져 버린 누님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위독한 와중에도 내게 걱정스럽게 “학교를 쉬면 안 된다” 며 돌아가라고 소리치던 누님의 목소리도 귓가에 맴돌았다. 아련한 생각을 잊으려고 초원에 풀썩 주저앉았다. 멀리 북쪽을 바라보니 낙성식을 눈앞에 둔 제2카노加納소학교가 선명한 주홍 빛깔을 발휘하고 있다.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엷은 세피아 색으로 배경을 수놓고 있다. 그를 원경遠景으로 놓자 중경中景으로는 왼편에 조선인들의 가옥이 있고 옆에는 보리밭의 녹음이 조화를 이룬다. 그 사이를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발밑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아, 그야말로 충분한 절경이다. 나는 연필을 집으려 했다. 그러나 하야시는 고개를 젓고는, 나와 등진 채 자리를 잡고 연필을 꺼낸다. 갑자기 뒤에서 자전거 벨이 울린다 싶더니 아이들의 무리가 “야, 너희들 여기 있었느냐?” 운운하며 자전거를 몰고 왔다. 의아한 채 가만히 있자니 다가와서는 “이야,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하고는 사라져갔다. 아무리 봐도 연배는 얼마 나지 않음이 틀림없다. 바로 옆까지 와서야 다른 사람인 줄 알았으니까. 조금 있자니 돌아와서는 한 번 더 사과하고 떠났다. 시골 사람들의 공손함을 살짝 느꼈다. 아무리 떨어져 있다 한들 기후에서 0.5리 거리인데 기후 사람들의 정서와는 천양지차다.
혼자서 감상에 빠져 있자니 하야시는 이미 그림에 몰두해 있다. 하야시는 머리가 좋아서 구도를 빨리 선정한다. 나로선 턱도 없다. 한 장에 칠 전짜리 목탄지도 똑같이 이 년 묵은 한 장에 십 전짜리 목탄지보다 상태가 나쁘다. 아무리 색을 덧칠해도 그에 비례해서 종이에 스며들지 않는다. 종국에는 환멸감과 비애가 느껴졌다.
시계를 보니 그리기 시작한지 두 시간 반이 지나 열두 시를 넘겨 있었다. 그림은 대충 완성되었다. 봄날 햇빛은 길고 한가로웠지만 우리들의 공복 사정은 그렇지 않다. 하야시는 늘 “배고픔을 초월하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 고 말했는데 실로 그 말은 영험하기 그지없어, 짐을 챙겨 돌아갈 무렵에는 앉아 있을 때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몸 상태는 다소 나빠졌지만 말이다. 돌아가는 길에 제2중학교에서 운동을 하자고 정한지라, 담장을 넘어가 운동장에 있던 원반을 던지며 주고받았다. 어떻게 해도 손에서 원반이 빠져나가는지라 “이러니까 선수가 따로 있는 거지. 다 잘 던지면 선수도 있을 수 없는 법이니까.” 라 생각하기도 했다. 또 카노에서는 연이 유행인지 내 키보다 큰 것만 둘이서 함께 날렸다.
운동장 근처에 올라와 있기만 했는데 열 시 가까이 되었다.
놀이는 끝났지만 집에 돌아가기가 싫었다. 공복인데다 무거운 짐까지 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한 시간 후 우리는 다리를 질질 끌며 걸어갔다.
아, 즐거우면서도 서글펐던 봄날 하루여.

*訓盲院, 농아와 맹아들을 가르치기 위한 기관

코지마 노부오, <어느 봄날의 일요일春の日曜の一日>

코지마 노부오 초기작품집小島信夫初期作品集 공원, 졸업식 公園 卒業式 수록


제 1장 캐러화하는 젊은이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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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공간에서의 캐릭터


2010년 11월 20일자 조간 아사히신문에 '캐릭터, 연기하기 지쳤다キャラ、演じ疲れた' 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되었다. 최근 수년 간 아이들이 '캐릭터' 란 단어를 쓰는 것을 자주 듣긴 했다. 그러나 당사자들이 그렇게 캐릭터를 계속 연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세상에 지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 기사의 요지였다.

다음은 그 기사를 인용한 것이다.


"'저 캐릭터를 바꾸고 싶어요. 이대로는 제가 바보가 될 것 같아요.' 산인 지방[각주:1]의 어느 중학교에 설치된 상담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임상심리사 이와미야 케이코 씨에게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방문했다. 그녀는 친구들로부터 딴죽을 걸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신비한 느낌의 천연 캐릭터天然キャラの不思議ちゃん[각주:2]' 를 연기해 왔지만 본연의 자신과는 동떨어진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 지쳐 고등학교에 입학하면 캐릭터를 바꾸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그밖에도 '괴롭힘당하는 캐릭터いじられキャラ[각주:3]' 를 연기하여 반에서 자신의 입지[각주:4]를 만든다든지 '독설 캐릭터' 라 불리던 여자아이가 "최근에는 제가 독설을 하길 주변 아이들이 기대해서 힘들어요" 라 고민하는 등의 사연들이 이어졌다. 아니나다를까 그 '롤모델' 의 출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주고받는 대사와 행동이었다."


요 몇년 동안 학교 공간에서의 캐릭터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여러 입장에서 지적되고 있다. 어느 조사에 따르면 교실에는 학생 수만큼의 캐릭터가 존재하고 각기 미묘하게 차별화되어 '캐릭터가 겹치지 않도록' 조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로 '괴롭힘당하는 캐릭터' '오타쿠 캐릭터' '천연 캐릭터' 등이 알려져 있다. 어떤 캐릭터로 인식되느냐에 따라 아이가 교실 공간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캐릭터 없이는 더이상 평화롭고 즐거운 학교 생활을 지속할 수 없다. 이것은 호들갑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다. 그렇다, 이제는 교실 공간은 '캐릭터 생태계' 라 말할 양상을 드러내기에 이른 것이다. 약육강식의 먹이사슬이 존재하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 위한 '서식지 격리[각주:5]' 가 있다. 그렇다면 교실 공간을 지배하는 '적자생존' 의 원리는 어떤 것일까.

교실에서의 캐릭터 성립을 고찰할 때 이해해둘 배경 지식이 두 개 있는데, '스쿨 카스트' 와 '커뮤니케이션 격차' 이다. 스쿨 카스트부터 설명해보자. 교실에는 꼭 여러 개의 그룹이 있다. 이들 그룹 간에는 분명한 상하관계가 있고 극단적인 경우 개개의 학생들이 그룹을 넘어 교류하는 것조차 없을 정도이다.[각주:6] 이러한 학생들 사이의 서열 제도를 가리켜 '스쿨 카스트' 라고 한다. 당연히 유래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이다. 초등학생 때는 이러한 '신분차' 는 그렇에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춘기를 맞는 중학교 이후에는 이러한 계층화가 급속도로 진행된다.

이때 소위 '같은 신분' 인 그룹 안에서 역할로서의 캐릭터가 나누어지는 것이다. 캐릭터 배분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고,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캐릭터는 본인이 스스로 인정하는 성격의 방향과는 미묘하게 다른 경우도 있지만 한번 정해진 캐릭터는 거의 변경되지 않는다. 캐릭터로부터 일탈하거나 하는 행동을 하면 그걸 이유로 무시하거나 열외시키는 등의 따돌림으로 발전할 경우조차 있다. 즉 실질적으로 그들에게 캐릭터란 거의 강제되는 것이다.

스쿨 카스트의 구성은 대개 다음과 같은 식이다. 카스트 상위(1군, 혹은 A랭크)를 점하는 학생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데, 축구나 야구 등 발군의 운동신경(단 아무 운동이나 해당하는 건 아닌 듯하다)을 갖고 있고, 사교적이고 친구가 많고 모임의 분위기를 지배하며 유머 센스가 있고, 몸매나 옷차림을 포함한 용모가 뛰어나고, 이성 관계가 윤택하고 성 경험도 있다. 따라서 카스트 하위의 학생을 괴롭혀 웃음거리로 만들거나 싫은 일을 강요할 힘이 있다.

카스트 하위(3군, C랭크)는 이와는 정반대로 생각하면 된다. 운동치이거나 문화계[각주:7]이고 외모가 두드러지지 않고 이성 관계도 빈약하고 특히 오타쿠스런 취미가 있을 경우 카스트 최하위 확정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참고로 지식이 풍부하다든지 공부를 잘하는 것은 요즘은 인망과는 전혀 관계없는 능력으로 치부되는 듯 하다.[각주:8]

2군 또는 B랭크는 상위층과 하위층의 중간 계급으로 대다수 학생들은 여기 속한다.

이러한 계층은 유동성이 적고 일단 카스트가 결정되어 버리면 적어도 일년 - 즉 반이 또 바뀔 때까지 - 은 안착하게 된다. 모리구치 아키라[각주:9]이러한 카스트 분위를 정하는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이들은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나 반 배정을 받았을 때 각 사람의 의사소통 능력, 운동 능력, 용모 등을 재며 첫 한두달 동안 학급에서 자신의 위치를 탐색합니다. 이때 상위 계급을 차지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일년간 '왕따' 를 당할 위험에서 벗어납니다.  거꾸로 하위 계급밖에 차지할 수 없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고위험군으로서 일년을 보내야 합니다. [각주:10]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이 '커뮤니케이션 편중주의' 이다. 좀 더 모리구치 아키라를 인용하자면 

"스쿨 카스트를 결정하는 최대 요인은 '커뮤니케이션 능력' 이라 생각합니다. (단 고등학교의 경우 학교의 레벨에 따라 학력이나 싸움 능력도 큰 요인으로 작용한다)"[각주:11]

그렇다. 이제 아이들의 대인 평가는 거의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능숙함 여부만으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명백한 이상異常 상태이다. 내가 중학생이던 삼십 년쯤 전의 교실은 요즘 교사라면 틀림없이 ’선택성 함묵증'[각주:12]이나 '광범성 발달장애[각주:13]' 란 진단을 내렸을 게 틀림없을 정도로 말이 없는 학생이 두세 명은 있었다. 확실히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낮았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말이 없어도 구기 운동을 잘한다든지 그림을 잘 그린다든지 하는 점을 평가받아 다른 학생들이 괄목하고 관심을 가졌다. '옛날이 좋았어' 같은 안이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학생들 사이의 대인 평가의 기준은 그때가 훨씬 다양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커뮤니케이션 외의 재능은 괄목의 여지가 거의 없다.

한때 아이들의 준거 사회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갖던 '공부' '그림' '글솜씨' 같은 재능은 이젠 대인 평가의 축으로는 기능을 상실했다. 심지어는 상황에 따라 그런 재능을 발휘하여 캐릭터에서 일탈했다는 이유로 카스트 분위가 추락하는 사태도 발생할 수 있다.


'자기탐색' 유형自分探し系, 캐릭터의 기원으로 보자면


젊은이들의 커뮤니케이션 양상이 변해간다는 것을 내가 실감한 건 십 년 정도 전에 쓴 어떤 원고가 그 계기였다. 모 잡지의 기획으로 시부야와 하라주쿠에서 표본 조사를 위해 몇 사람의 젊은이들과 인터뷰를 하고, 그들에게서 어떠한 '부족 집단' 적 차이가 있는지의 여부를 검토해 보려 할 때였다.[각주:14]취재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간단히 말해 시부야 유형의 젊은이들은 유난히 친구가 많고 사교성이 높았으며 하라주쿠 유형은 대인관계가 그렇게 넓지는 않으나 자신의 목표를 확실히 가졌다는 것의 차이가 분명히 나타났다. 표본 사례의 수가 각각 세 명씩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것을 현장 조사의 성과라 칭하며 일반화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 인터뷰 경험은 젊은이들을 고찰할 때의 하나의 구조적인 시점을 형성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현대의 젊은이들은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기준으로 대략 두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 '자기탐색' 유형과 '은둔형 외톨이ひきこもり' 유형으로 말이다.

미리 말해두자면 어디까지나 두 유형은 가역적이다. 고정적인 성격의 분류와는 다르다. 동일한 개인이 장소에 따라 '자기탐색' 유형처럼 굴거나 '은둔형 외톨이' 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당장 나부터 명실상부한 '은둔형 외톨이' 유형임을 스스로 인정하지만 어울리는 상대나 상황에 따라 '자기탐색' 유형처럼 굴고 마는 경우도 있다.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자기 이미지의 안정성은 많은 부분에서 반비례의 관계에 놓여 있다. 이런 경향은 특히 사춘기·청년기에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쉽다. 예를 들어 은둔형 외톨이 유형의 젊은이는 일반적으로 의사 소통에 소극적이거나 서툰 대신 비교적 안정된 자기 이미지를 갖고 있다. 반면 자기탐색 유형의 젊은이는 높은 사교성을 보유한 대신 자기 이미지가 불안정해지기 쉽다.

따라서 각각 사회 적응 단계에서 좌절하고 낙오되어 갈 때의 방향성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은둔형 외톨이 유형은 글자 그대로 방 안에 틀어박히거나 노숙자가 될 위험이 있다. 이것은 의사 소통의 단절을 한층 철저히 하는 방향이다. 반면 자기탐색 유형은 종교나 주술에 심취하거나 자해 행위로 발전할 염려가 있다. 이쪽은 반대로 의사소통이나 인간관계에 대한 의존이 폭주를 일으켰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캐릭터란 자기탐색 유형을 위해 있는 말이다. 자기 이미지가 정착되지 않았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별개의 소통 공간에서 그때그때 장소와 상황의 분위기를 따라 캐릭터를 만들어내거나 또는 살짝 조정하는 재능은 자기탐색 유형만의 장점이란 것이다. 즉 '가면을 잘 쓰기 위한 재능' 이란 말이다. 반면 은둔형 외톨이 유형은 고유한 자아 외의 다른 캐릭터를 만든다든지 하는 방면은 참패를 맛볼 수밖에 없다. 왜냐면 그들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패배의식이 짙고, 오히려 자기 이미지가 확립되었기에 장소와 상황에 따라 캐릭터를 갈아끼우는 건 서투르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 말수가 없는 것이 캐릭터성을 갖는 경우도 있긴 있지만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학교 공간에서 압도적으로 상위를 차지하는 것은 '자기탐색 유형' 의 학생들이다. 과잉적으로 사교성이 높은데다 쉽게 동질 집단을 형성하고 학급의 중심이 되어 지배적인 권력을 휘두른다. 반면 '은둔형 외톨이' 유형은 동질 집단의 응집력이 약하고 각자 고립되기 쉬워서 학급 내에서도 아웃사이더로 겉도는 존재가 되기 쉽다. 결국 스쿨 카스트 내에서 그들의 존재는 무시당하거나 교실 내 담화의 소재로 굴려지는 정도의 가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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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번역문에 대한 모든 권리는 출판원 ちくま文庫와 저자 斉藤環에게 있습니다.


  1. 역자 주. 山陰地方, 츄고쿠 지방에서 동해에 접한 지역으로 보통 톳토리 현, 시마네 현을 일컫는다 [본문으로]
  2. 역자 주. 천연天然이란 캐릭터 특성 중 하나로 '순진하고 세상의 때가 덜 타 천진난만하고 낙천적인 모습을 보이는 성향' 을 일컫는다. [본문으로]
  3. 역자 주. 따돌림을 당한다는 게 아니다. 서문에서 언급한 만담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는 일본은 준거 공동체에서도 '기가 세고 딴죽을 거는 역할' 과 '기가 약하고 딴죽을 받아주는 역할' 의 구분이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본문으로]
  4. 역자 주. 이바쇼居場所。직역하면 '있을 곳'.근대화 이후 사회경제구조의 개편과 함께 빠르게 개인주의가 스며들며 형성된 일본인의 정서 코드. 단어를 좀더 구체적으로 풀자면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 안식할 수 있는 곳' [본문으로]
  5. 역자 주. 원문 : 棲み分け。영어로는 habitat isolation. 생활양식이 유사한 복수의 동물 개체 또는 개체군이 터전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나누어 차지한 채 생존하는 현상. [본문으로]
  6. 도이 타카요시土井隆義 「캐릭터화하는 / 캐릭터화되는 아이들キャラ化する / される子どもたち 」이와나미 북클릿岩波ブックレット에서 발췌 [본문으로]
  7. 역자 주. 일본 공교육 하의 학생들의 방과후 활동部活動은 크게 체육계, 문화계(연극, 서예, 다도 등 정靜적 활동), 귀가부(부활동을 안함)로 나뉜다 [본문으로]
  8. 역자 주. 우리나라에 공부벌레란 말이 있듯 일본에도 공부에만 매달리는 학생을 두고 주로 다른 학생들이 비꼬는 말로 카리벤カリ勉이있다. [본문으로]
  9. 역자 주. 森口 朗(もりぐち あきら、1960年6月1日 - ). 일본의 교육평론가 [본문으로]
  10. 모리구치 아키라 「따돌림의 구조」(신쵸신서新潮新書)에서 발췌 [본문으로]
  11. 모리구치 아키라 「따돌림의 구조」(신쵸신서新潮新書)에서 발췌 [본문으로]
  12. 역자 주. 場面緘黙症, Selective Mutism. 가정 등에서는 문제없이 말하지만 사회적 불안증으로 학교, 유치원 등특정 공간에서 발화를 못하는 증상. [본문으로]
  13. pervasive developmental disorders, PDD. 사회성, 커뮤니케이션 기능 등의 발달 지체가 특징인 다섯 가지 정신 및 행동장애군의 총칭. [본문으로]
  14. 사이토 타마키 『젊은이의 모든 것若者の全て』,PHPエディターズグループ 수록 [본문으로]

1장 세 악마 ~루터가 말하는 악마, 밀턴이 말하는 악마, 괴테가 말하는 악마~ (1)

루터, 밀턴, 괴테. 한데 엮기엔 매우 이질적인 이름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세 위인을 각자 '악의 원칙' 을 제창한 대표자이며 또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악을 규정지은 사람으로서 연결짓는다면 흥미가 번뜩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 사람은 각자 악의 개념을 두고 가장 저주스러운 존재로, 사람의 일에 끊임없이 작용하는 자로, 악한 속성의 것을 만들어내는 기능을 하는 자로 기록에 남겼다. 루터만큼 놀라울 정도로 인류 최악의 공적公敵으로서의 악의 존재에 대해 그 진심이 와닿는 사람도 없다. 특히 루터의 시대에는 그의 행보를 방해한 악을 그 스스로 가능하다면 "주의 은총으로부터 떼어내고 싶다' 고 여겼을 정도이다. 악에 대한 루터의 정확한 개념은 그의 삶과 저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밀턴이 말하는 사탄과 마지막으로 괴테가 말하는 메피스토펠레스가 있다. 세 개념을 뒤섞거나 그때그때 서로 혼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 위대한 원칙을 같은 것으로 놓고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그 특이성과 차이점을 연구 과제로 놓기엔 적절하지 않은 걸까? 실은 밀턴의 사탄과 괴테의 메피스토펠레스는 애매한 안티테제로서 빈번하게 대조되어 왔다. 그리고 어느 저자도 괴테의 메피스토펠레스를 기술하며 밀턴의 사탄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둘의 차이에 대한 논문은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린 그러한 담론에 더 위대하고 수용성 높은 지론 - 즉 밀턴의 사탄과 괴테의 메피스토펠레스에 대한 담론에 루터의 악마에 대한 지론을 거드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이론적 논의는 그다지 전제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목적은 세 악의 원칙의 매우 뚜렷한 윤곽을 찾아 비교하는 것이 전부이다. 경험에 기반한 하나와 시로 쓰인 둘을 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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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마지막 문장은 발제 단계부터 루터의 악의 원칙에 대한 개념과 밀턴과 괴테의 개념이 근본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을 인지한 채 전개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저 셋은 모두 악을 창출하는 기능을 하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성서에 입각한 관점에서 그 근간을 두고 있다. 루터는 성서의 사소한 문장과 부호까지 굳게 신봉하는 사람으로서 악마에 대한 서술 역시 신봉했다. 그에 따라 자기 자신과 외부에서의 악의 경험을 악마에 대한 검증의 형태로서 쏟아부었다. 그가 그런 예비적인 구상이 없이 시작했다면 자신의 경험을 그 외의 방식 - 그렇게 효과적이지도, 루터답지도 않은 - 으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에 부딫혔을 것이다. 밀턴 역시 성서에서 실낙원의 사탄의 구상 요소들을 차용했다. 실낙원의 주인공은 성서의 타천사이다. 그리고 이 시의 가장 인상적인 점 중 하나는 작중에서 순수한 신학적 서술로 빛나는 작가의 위대한 상상력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괴테의 메피스토펠레스가 밀턴의 사탄이나 루터의 악마에 비해 성서의 정신이 발현되지 않았단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메피스토펠레스에서조차 똑같은 전승적 존재의 윤곽을 인식한다. 그렇기에 이 셋은 모두 공통점이 있는데 첫째, 악을 창출하는 저주스러운 실체의 존재에 대한 성서의 관점에 기초한 것이며 둘째, 많게든 적게든 그에 대한 성서의 근거를 차용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했듯 루터의 악마와 밀턴, 괴테의 악마는 각각 다른 범주에 속한다. 루터의 악마는 자전적, 전기적 현상이고 밀턴의 사탄, 괴테의 메피스토펠레스는 문학적 발현이다. 루터는 개인의 경험을 예시로 성서의 악한 존재를 설명하였다. 그가 맞닥뜨린 방해가 무엇이든, 자신의 마음이나 외부 환경에서 찾은 성령의 은총의 장애물이 무엇이든, 복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똑똑히 본 무슨 일이든, 교단에서 부정하거나 서운한 영혼의 체험이 발생하는 어떤 사태이든, 자연에서 발생한 어떤 악질적인 기현상이든, 그는 그로부터 악마에 대한 더 선명한 이해를 얻었다. 이렇게 보면 루터는 자신의 전 생애를 악마의 형상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는 데 바쳤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반면 밀턴의 사탄과 괴테의 메피스토펠레스는 시적 창조물이다. 하나는 서사시이고 또 하나는 희곡이다. 밀턴은 성서에서 구상 요소들을 차용하며 타락한 대천사를 묘사하는 데 열을 올렸는데 , 그가 천지창조의 시대부터 존재했다고 가정하며, 여전히 전능자와 싸우고 있거나 거대한 복수를 획책하며 별들을 돌아다니고 있다든지 하는 역할을 심혈을 기울여 정했다. 괴테는 악령이 6천 년 동안 존재해 왔으며 더이상 이동력이나 우주에 대한 간섭력이 예전같지 않으나, 익히 알려진 그의 역할을 번잡한 도시와 개개인의 마음에 발휘한다는 묘사에 힘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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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번역에 대한 권리는 David Masson과 University of Edinburgh, MACMILLAN AND CO. 에 있습니다.